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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Oct 15. 2019

소파의 부재


소파란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길고 푹신한 의자이다. ‘긴 안락의자’, ‘긴 의자’로 순화한 말을 가리킨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를 오던 때, 즉 1년 반 전에 (큰 맘먹고) 구매했던 소파가 며칠 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오래 쓸 생각하고 구입한 가구는 아니었지만 일 년 쓰면 버려야 할 싸구려 가구도 아녔기에 서너 해는 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털썩 앉았는데 급 콰지직, 소리를 내며 가라앉은 소파는 지금도 쓸쓸히 기능을 상실한 채 마루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어제는 내게 안락함을 주던 한 가구였지만 오늘은 어떻게 버릴지 전전긍긍하는 쓰레기가 된 믿기 힘든 현실. 아아, 그는 좋은 소파였습니다.




 파리 시 사이트에 들어가 가구를 버리는 신청란을 클릭하고, 부피가 큰 소파에 체크를 했다. 이제 번호를 적어 밖에 내놓기만 하면 이제 이 소파와는 안녕인 것이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의 가구는 튼튼하거나 오래 쓰는 좋은 가구가 아닌, 이케아 (상대적으로 가격이 합리적이지만 몇 해 넘기기 힘든) 출신 가구이거나 또한 DIY, 즉 Do-It-Yourself 가구가 많다. 계획이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것이기에 비싼 가구를 무턱대고 샀다가 급 다음 달에 귀국 결정이 나거나 다른 일이 갑작스럽게 생긴다면? 미래를 바라보고 오늘을 살아내지만 막상 지금 발 딛고 서있는 '현재'에는 많은 돈을 투자하기 힘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 날 친한 형이 내게 말했다. 공간이 바뀌면 관점이 바뀌고, 관점이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고. 확실히 집과 내 동선에 알맞고 편안한 가구들이 주는 안정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게다가 내 집에 들일, 내가 쓸 가구와 물건들을 고르고 맞춰 살 수 있다는 것은 또한 큰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산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소파가 덜컥 반으로 부서지는 상황에 놓이면 참 막막할 수밖에 없다고요. (물론 새로운 소파를 구매할 여유의 유무는 별개의 이야기다)




몇 년 전, 11m2(3.5평) 스튜디오에 살았던 적도 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때의 이야기를 풀자면, 가장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이다. 부득이 금전적 도움을 받지 않는 자립을 선택했기에 나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마땅하다고 여겼으나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 수 있냐며 지금도 가슴 아파하신다. 나름 부엌, 미니 냉장고, 책상+책장 그리고 접이식 침대와 샤워부스까지 정말 치밀하게 짜인 공간에서의 생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실천했던 무소유의 그때 유학생활이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다. 소유한 것이 없으니 단출하게 어디든 휙 떠나 여행을 하기 좋았고, 큰 창이 나있어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혼자 피아노를 칠 수 있음이 좋았고, 무엇보다 창 밖으로는 정원이 나 있어서 하늘과 예쁜 꽃들이 만발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팔을 뻗으면 집안 어디에나 닿아 편했다는 거.




주저앉은 소파를 바라보자니 참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한밤 중 레슨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몸을 받아주던 소파의 넉넉한 인심이 지금 와서야 선명해진다. 어쩌면 고마움을 몰랐던 나를 소파가 밀어낸 것일 수도 있다. 소파를 버리고 나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정리해 적어 놓은 수첩을 다시 펴보았다. 내 자산은 얼마인가, 총 보유하고 있는 물건은 몇 개 인가를 정리해 놓았던 기록이다. 일단은 책과 악보가 압도적으로 많다. 악보집은 다 외웠음에도 그 시절 치열히 연습했던 연필 자국은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갖고 있고, 책은 한국에서도 조금씩 사 왔는 데다가 여기서도 한 두 권씩 모았다. 그렇게 짐을 늘리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책장과 바닥엔 책이 한가득이다.




늘 언제든 훅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짐이 많지 않아야 했다. 실제로 일 년에 최소 여섯 번은 장거리 비행을 하는 데다 짐도 꽤나 자주 싸며 산다. 그럼 이 많은 물건들은 대체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책이야 주위에 필요하다면 나눠주기도 하고, 빌려오기도 하며 줄기도 늘기도 하지만 옷은 그렇게 사모으는 편이 아닌데도 옷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대외적인 활동이 많은지라 (강연에, 공연에, 가끔은 통역까지) 일상복까지 합하면 다양한 장르의 옷이 가득했다. 대부분 정장 재킷, 바지 그리고 소매가 없는 옷을 좋아해 깔 별로 갖고 있는 나시티, 셔츠 등... 겨울 옷까지 하면 과장을 좀 보태서 부피가 한 트럭만 한 상황이다. 자리에 알맞은, 그리고 깔끔한 옷을 차려입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옷을 구매할 때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이었던 것이 문제였나.




당장 일어나 묵혀뒀던 옷들을 꺼내 입지 않는 옷, 내 몸에 맞지 않지만 남의 시선에 억지로 구겨 넣었던 옷 모두를 정리했다. 미련 따위는 버리자는 마음으로. 신발도 마찬가지다. 정장 구두, 운동화, 슬리퍼 등 더 이상 신지 않는 옷들은 싹 다 정리했다. 이렇게 얘기하니 꽤나 많은 것 같지만 사실 예전 한국에서 보다야 훨씬 줄은 것이다. 철없이 옷에 꽤나 상당한 양의 월급을 투자할 시절엔 공연 의상과 10cm가 넘는 킬힐들을 미친 듯이 사모았었기에 늘 옷을 이고 살았다. 아직도 버리고 있고, 버릴 것이 많이 남아있지만- 무대 위에서 비치는 모습에 대한 갈망과 욕심은 참 거대하다. 물론 지금은 내가 편안한 옷을 입는 것이 내가 돋보이는 옷을 입는 것보다 연주가 훨씬 더 잘 됨을 배웠기에 불편한 옷은 미련 없이 버렸다.




소파의 부재 하나로 이렇게 집안이 텅 빌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안 그래도 집안 사진을 찍어달라는 친구들의 요청으로 요리조리 노력은 하는데, 그때마다 이사 가냐는 식의 물음이 나올 정도로 텅 빈 (벽이 온통 흰색에 가구가 많이 없는) 집이기는 하지만, 의도치 않게 더욱 빈 공간이 늘어났다. 이제 집에 있는 큰 가구는 피아노와 침대뿐이다. 자고 일어나 연습만 하라는 뜻이겠거니, 더욱 치열히 공부하는 것이 옳겠거니 생각하자.




그리하여 내린 결론. 이케아에서 적당한 소파를 골라 주문하기로 했다. 곧 한국으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기에 구매 시기는 조금 미뤄질 테지만. 어머니가 가끔 내가 쓰는 글을 읽으시는데 소파가 부서진 걸 알면 당장 사라고 하실게 뻔하다. 가족 선물도 사 오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시는데 사가는 사람 맴이라니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님 만큼은 챙기고 싶은데 어떡하나. 프랑스 내에서도 유명한 비타민이며 화장품이며 매번 쟁여가는데 매번 걱정만 시키는 못난 딸이라 이런 거라도 쥐어드려야 마음이 덜 불편하다.




올해도 벌써 반 하고도 9월 한 달이 지나갔다. 올해 초에 적어두었던 버켓 리스트를 다시 훑어보았는데, 생각보다 아예 이룬 것이 없진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 가장 잘 이룬 일은 우울증 약 끊기다. 사실 완전히 끊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일주일째 복용을 멈춘 상태. 조금 더 두고 보겠지만 아직은 나쁘지 않기에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버켓 리스트의 마지막,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기-는 현재 진행형인 만큼 가장 고민하고 있는 일이다.



    

    내가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 머리 위에 지붕이 있다. 오늘 하루 굶지 않았다. 타인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다.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 나를 돌봐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더 나은 내가 되려 노력한다.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다. 꿈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지금 살아 있다. 이처럼 작은 것들에 감사하자.






by Lay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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