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당연히요.
”이번 아파트도 떨어졌네…“
한숨을 푹 쉬며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아내는 내 손을 꽉 잡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주변의 기류가 이상했다. 추첨이 다 끝났는데,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내의 옆에 서서 기다렸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흘렀다.
삼십분 쯤 흘렀을까.
갑자기 무대 위로 아까 사회자가 다시 등장했다. 분명 아까 추첨은 종료되었다고 했는데. 장내가 술렁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빼고 무대 쪽으로 걸어나갔다.
”예, 지금 계약 취소 물량이 좀 생겨서요…“
아까 계약하러 사무실에 들어간 사람 중에 계약을 포기한 사람이 생긴건가? 향이나, 층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아니면 자격이 미달되었나?
”번호표 두 개만 더 추첨하겠습니다.“
헉!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경쟁률은 아까보다 훨씬 낮아졌다.
끝까지 기다리고 서 있었던 사람은 약 스무 명 남짓.
우리 두 명이 쥐고 있는 번호표는 두 장이었다.
”네 37번이요.“
”……“
”안계시나요? 그럼…72번입니다.“
”접니다!“
팔짱을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던 청년 한 명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아이 깜짝이야.
“네. 안내를 받아서 저 사무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리고…128번이요.”
“……”
“그럼…333번이요.”
“……”
추첨이 끝난 후 모두가 우루루 나갔기 때문에 번호표 호명은 계속되었다.
사회자는 남은 사람들을 살펴 보며 계속 번호표를 뽑았다.
“네 그리고…57번이요.”
“저요!!”
흥분이 잔뜩 담긴 목소리와 함께 아저씨 한 명이 튀어나오듯 달려나왔다. 57번 아저씨는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아……역시 또 떨어졌네.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그…여보. 마지막 두 개도 떨어졌는데…”
“좀 만 더 기다려보자.”
아내가 내 말을 막았다.
“지금 뽑은 두 개 말고도 취소 물량이 더 나올 수도 있어.”
번개 맞은 것 같았다.
아내는 옳았다. 십 오분 정도 있다가 또 사회자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그녀는 귀에 무전기를 꽂고 있었다. 이제 학습효과가 생긴 우리 모두는 놀라지 않았다.
“예, 취소물량이 또 하나 생겼다고 하네요. 한 장만 더 뽑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사회자는 약간 피곤한 표정이었다.
“공지를 드려야 하겠네요. 번호표랑 개인정보가 매칭되지 않으면 계약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혹시 여기에 부동산하시는 중개사 분 계시면, 그냥 돌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대충 돌아가는 눈치가,
부동산에서 물량공세로 번호표를 마구 사들여 당첨되는 경우에는 시행사에서 계약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 번호표와 이름을 매치해서 크로스체크하나 보다. 부동산에서 아파트 사재기 하는 걸 방지하는 목적이겠지.
암 당연히 그래야지!
언짢은 표정의 아저씨 두 분이 투덜투덜하면서 문 밖으로 나갔다. 부동산에서 오셨나 보다.
아내는 이미 무대 바로 앞 까지 나가있었다.
“예, 203번…”
또 우리 건 떨어졌어. 그럼에도 아내는 두 손을 모아쥐고 사회자만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었다. 203번 아주머니를 사무실로 보낸 후 사회자는 무대 옆에서 잠시 대기하는 것 같아 보였다. 또 취소 물량이 나오나 기다리나 보다. 사회자는 우리 부부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사회자가 아내에게 물었다.
“신혼부부시죠? 몇 번이세요?”
“저희…424번이요.”
“이런…되시면 좋을텐데. 지금 계속 취소물량이 나오고 있기는 한데. 이것도 두어 개 정도만 더 하고 아예 추첨 종료 할 거 같긴 해요.”
사회자는 아내를 짠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일까.
“저희 시행사에서 부동산 물량을 걸러내느라고 계약과정이 좀 걸려요. 공정하게 하려고 하거든요.”
“네 맞죠 맞죠. 저희는 정말로 여기서 살 거에요. 신혼부부구요…”
갑자기 자기 PR 시간이 되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잠깐만요…”
사회자가 귀에 걸린 무전기를 잡고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네. 한 분 더 추첨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왔다. 투명한 통 안의 종이쪽지들.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 그녀가 손을 뒤적뒤적하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117번? 계세요? 117번입니다. 117번!”
“……”
없다. 117번은 아까 집으로 갔다.
“그럼…”
사회자가 또 한 장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펼쳤다.
“424번!”
우리 번호였다.
아내가 휘청였다. 아내 대신 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저희, 저희 번호입니다!!!”
사회자가 우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뭐라 뭐라 말도 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축하한다는 말이겠지?
우리는 안내해주시는 분을 따라 사무실 앞으로 갔다. 이미 두어 명이 사무실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아까 당첨된 203번 아주머니와 57번 아저씨 한 분이었다.
“아까부터 기다리던 그 신혼부부네? 축하해요잉.”
57번 아저씨가 넉살 좋게 우리 부부에게 축하한다고 인사했다.
“네 고맙습니다. 어떻게 취소 물량이 계속 나와서 저희까지 이렇게…”
“그려. 향이랑 층 같은게 맘에 안들기도 하면 계약이 파토가 나기도 하더라고오.”
“아...아무래도 저희 물건은 좋은 물건은 아니겠네요.”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은평구에 이런 신축물건은 일단 잡아야 해. 무조건 동 층 상관 말고 받아 오라고 우리 안사람이 그러더라고잉.”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의 팔을 잡았다. 방금 사무실로 들어갔던 203번 아주머니였다. 이쁘장한 아주머니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저기, 총각. 물어 볼 게 있는데, 나 지금 들어가보니 우리 물건이 801동 205호더라구요. 2층이면 아무래도 좀 불편하고 그렇겠지? 어떻게 생각해요??”
“엇…2층 물건 받으셨어요?”
계약금 천만원을 넣기 전, 아주머니는 극도의 불안감을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사무실에 잠시 양해를 구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생면부지인 줄을 서 있는 우리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다. 대화를 나누던 57번 아저씨와 우리 부부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 너무 불안해서. 아니 이게 가격이 5억이면 우리한테 너무 큰 돈이잖아. 2층 괜찮을까?”
“아이 잠깐만 기다려보소!! 내가 전화 한 번 돌려볼랑게!!!”
57번 아저씨가 호기롭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이, 난데. 뭐 좀 물어볼라고잉. 지금 내가 녹번역 래미안 계약을 왔는데, 801동 205호 괜찮은가잉?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래??“
57번 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폴더폰을 탁 접었다.
”아주머니, 내 안사람이 부동산을 하는데,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그냥 계약 하시라 합디다.“
”그래요? 2층도 괜찮대요?“
”무조건 하래요 무조건!“
그 순간 아내가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사모님, 꼭 하세요. 후회 안하실 거에요.“
”그래? 젊은 사람들이 똑똑하게 잘 알건데. 그럼 새댁 말이 맞을 것 같네. 고마와요!“
203번 아주머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아내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순간 ‘저 아주머니가 포기하시면 저 물건은 우리한테 오는건가…’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아내는 진심을 다해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했는데.
”424번님 이리로 들어오세요!“
사무실에서 우리를 불렀다. 이제는 우리 차례였다.
“101호요? 그리고…남서향.“
”네,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내와 나는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줍줍의 줍줍. 사람들이 사지 않겠다 하여 우리에게까지 흘러들어온 이 물건. 1층에 남서향. 4억 7천만원짜리 물건.
”네, 할게요. 이 계좌로 천만원 입금하면 되나요?“
”네, 그리고 여기 사인해 주시고요…“
우리의 첫 집은 1층의 남서향 집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집을 얻기 위해 우리는 3억의 빚을 졌다.
그래도 그런 건 좀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지금은 이 성공을 둘이서 만끽해보자.
계약서에 사인하고 우리는 모델하우스를 나왔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까랑 똑같은 풍경, 똑같은 인파 속이었는데 뭔가 달라져 있었다. 햇살은 따뜻하고 반짝이고 있었다.
”여보, 나 너무 배고파. 일단 뭐 좀 먹으러 가자.“
”그러자, 아까 얘기한 칼국수집 어때?“
우리는 손을 잡고 보도블럭 위를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작은 미스테리를 풀 시간이었다.
“여보, 아까 사람들 다 나가는데 어떻게 남아있자고 한거야?”
“아.. 나도 몰랐어.”
“당신도 몰랐어?”
“응. 그냥 맨 뒤에 뭔가 고수의 향기가 나는 아저씨가 꿈쩍 안하고 서 계시더라고. 그냥 그래서 그 아저씨 따라서 기다려 보자 싶었어.”
“그랬구나.. 우리 와이프 왜 이렇게 똑똑해??”
“헤헤...”
우리는 부부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큰 일들을 같이 치러내게 되겠지.
아내가 아내여서 다행이야.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