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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리스너 미라신 Sep 25. 2020

벌써 아홉시야

시간이 우리를 끌고 가는 삶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언제나 같은 소리 똑딱똑딱

하루 종일 일해요.


어릴 적 많이 듣고 불렀던 동요. 아이에게 불러주려다 멈칫했다. 정말 시계가 똑딱똑딱 소리를 내던가? 아무리 둘러봐도 똑딱똑딱 소리를 내는 시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초침·분침·시침이 부지런히 소리를 내던 시계는 무소음 시계로 바뀐 지 오래. 손목에 항상 매달려있던 손목시계는 시간을 알려주기 보단 패션의 하나가 되었고, 손에 들려있는 휴대전화가 이제는 시계의 역할을 대신한다. 손목시계도 벽시계도 본래의 목적을 잃은 요즘, 우리의 삶은 과거보다 더 시간에 얽매여 사는 듯하다.



전업주부가 된 지 2년, 직장을 다닐 때보다 좋은 건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는 거다. 출근 시간이 없으니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뛰지 않아도 되고, 시계만 노려보며 퇴근 시간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과거의 인류가 그랬듯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그제야 밥을 먹는 그런 삶. 물론 내 입장이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말이다. 시간에 매어있지는 않아도, 엄마의 시간은 온통 아이에게 맞추어져 움직인다.


나의 아침 일정을 좌우하는 첫째의 등원 시간. 아침 기상 후, 나의 신경은 온통 시계로 향해있다. 밥을 먹다 흘리면 옷을 갈아입혀야 하니 옷은 등원 15분 전에 입혀야하고, 동영상은 30분 이상을 넘지 않아야 하고,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할 때를 대비해 아이가 좋아하는 ABC 초콜릿도 몇 개 준비해두고.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마음대로 된 적이 있던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아이에게 항상 외치는 말. “아들~ 벌써 아홉시야.” 뭉그적뭉그적 신발을 신는 녀석의 발에 신발을 욱여넣고 한쪽 팔엔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 다른 한쪽 팔엔 둘째를 안고 ‘빨리빨리’를 외치며 또 한 마디 한다. “아들~ 벌써 아홉시라고. 버스 가면 어떡해.”


습관처럼 ‘벌써 아홉시야.’를 외쳐대는 엄마로 인해, 시계는 볼 줄은 모르지만 아홉시라는 말은 아는 큰아이. 일주일을 열심히 살고 주말 아침 늦잠을 자는 아빠에게 다가가 깨우며 하는 말. “아빠, 벌써 아홉시야. 잘 시간 아니야.” 집안일을 하다 잠깐 쉬는 나에게 다가와 하는 말. “엄마, 벌써 아홉시야. 리톨이랑 놀아줘야지.” (리톨이=첫째 태명)



아이에게 아홉시는 어떤 의미였을까?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시간이었을까? 아니지. 아직 시간을 모르는 녀석이니 싫은 시간이라기보다 그냥 듣기 싫은 말이었을지 모른다. 아이가 아홉시가, 더 나아가 시간을 지킨다는 것이 싫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몇 달 전부터 아홉시라는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다. 내가 하지 않으니 아이도 자연스레 “벌써 아홉시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시간은 무엇일까? 꼭 정해진 시간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때에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시간에 묶여있는 삶이 아닐까. 오늘은 시계를 보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해보아야겠다. 아- 물론 아이 등원 시간은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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