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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리스너 미라신 Sep 22. 2020

엄마는 왜 동생만 안아줘?

엄마가 혼자여서 미안함이 가득한 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잘 안았다. 자신의 아이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이도 거리낌 없이 안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는 그들의 모습과 비교하며 나 스스로를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여겼다. 용기를 내 아이를 안아보려 하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편함과 두려움이 흘러나와 작고 귀여운 아이를 안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모성애라 불리우는 사랑 때문인지, 나의 아이라는 책임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두 아이를 어떤 불편함과 두려움 없이 안을 수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여전히 다른 아이는 안을 수 없다는 거다.



초등학교 시절 수영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수영강사는 어떻게 숨을 쉬는지, 팔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발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여야 하는지 하나하나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안는다는 건 이렇게 하는거야.'라고 배워본 적이 있던가? 내 어린 시절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배운 흔적이 없다. 그냥 자연스레 어른들의 품에 안겨 안는 법을 배웠을뿐이다.


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안으며 '이렇게 하는거야'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엄마 안아줘'하는 말에 얼른 다가와 나는 작은 품안에 가득 안아준다. 작은 품이지만 그 안에서 따뜻함이 사랑이 마구 전해진다.



아이가 하나였던 몇 년간은 아이를 마음껏 품에 안아줄 수 있었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고부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바로 엄마를 혼자 차지하고 싶은 마음, 엄마품에 혼자만 안기고픈 마음이 만들어낸 둘의 경쟁. 큰아이가 앉아있으면 둘째아이가 얼른 다가와 오빠를 밀쳐버리고, 둘째아이를 안고 있으면 큰아이가 저 멀리서 쿵쾅쿵쾅 서운한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사실 이런 문제는 사소한 문제다. 바닥에 앉아 둘은 한쪽 무릎씩 차지하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이를 양육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잠투정'. 요놈이 바로 문제다. 둘쨰아이는 잠투정이 별로 없는데 비해 큰아이는 잠투정이 있다. 갑자기 화를 내고 말도 안되는 떼를 쓰기 시작하면 남편과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음... 졸려서 잠투정을 하는군.' 첫재와 둘째가 잠드는 시간이 달라, 첫쨰의 잠투정이 시작되는 남편은 큰아이를 나는 둘째아이를 안고 각자의 방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사건은 남편이 야근을 하느라 집에 아직 들어오지 못한 밤에 발생했다. 두아이를 모두 재우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만의 시간을 막 가지려는 찰나, 둘째가 엉엉 울면서 엄마를 찾아 방에서 나왔다. 우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 토닥여주는데 울음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 큰아이도 울면서 엄마를 찾는다. 계속 우는 둘째아이를 안은채로 큰아이를 토닥여주었다. 그때 날 미안하게 만든 첫째의 말. "엄마는 왜 동생만 안아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처럼 이제는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첫째. 그에 비해 둘째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나이다. 어딜 가더라고 첫째는 걷게하고 둘째는 안고 다닐때가 많다. 엄마아빠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첫째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아도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왔던 의문. 왜 엄마아빠는 동생만 안아주는가? 큰아이가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던 밤. 나는 엄마가 혼자라 참 미안해졌다. 엄마가 둘이라면 공평하게 똑같이 안아줄 수 있을텐데. '아이야, 엄마가 혼자라서 참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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