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언니. 휴대폰에 뜬 이름.
전화받기 전 크게 숨을 들이셔 본다. 내쉬면 받아야 하는데 매일 쉬던 숨을 내쉬기 싫었던 적이 있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의 20대를 함께했고, 결혼 후 친정언니처럼 나를 챙겨주었던 언니.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다가, 귀농하면서 멀리 떨어져 아쉬운 마음이 항상 내 마음에 남아있다.
멀리 있는 언니 전화에 평소라면 “언니야~” 하고 반가움을 목소리로 나마 전했을텐데. 이날은 수화기 너머 엉엉 우는 소리에 “언니” 소리도 왜 우냐는 질문도 내뱉지 못했다. 다행히 염려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희망적인 상황도 아닌 그런.
며칠 전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언니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말에 걱정이 앞섰다. 뇌문제면 심각한 거 아닌가. 안그래도 수술을 하셔야 한단다. 서울에 사시는 분인데 부천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하신다기에 의문은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언니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닐테니.
아버지 소식을 듣고 울산에서 부천까지 가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까. 가는 내내 걱정과 최악과 기적이 머리에 뒤엉켜 있지 않을까. 운전하는 형부는 괜찮은걸까. 항상 신호와 속도를 준수하는 형부인데 괜히 달리다 무슨 일이 나지는 않을까. 아닌가?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인가. 묻고 싶은 건 많지만 밖으로 낼 수는 없다.
며칠 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서 알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바로 병원에서 수술을 못하시고 부천까지 오신거란다. 뇌출혈 골든타임 4시간을 훌쩍 넘기고 수술을 받으셨단다.
“코로나 새끼.”
보이지도 않는 녀석에게 욕을 뱉어본다. 작디작은 바이러스 녀석이 전 세계인은 고사하고 가장 가까운 언니의 아버지를 힘들게 하다니.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녀석이지만 보이지 않으니 때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달려들어 죽이지도 못한다. 한 사람의 생명의 기로인 골든타임을 그깟 바이러스가 방해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전화 너머 언니는 엉엉 울고 있었다. 언니를 안 지 15년이나 되었지만 그런 울음은 처음이다. 나라도 듬직하게 믿음직스럽게 의지가 되도록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울음뿐이다. “언니야 언니.”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괜찮다는 말을 할 수도, 괜찮아지실거란 어쭙잖은 위로도 할 수가 없다.
교회에 다니는 언니는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피곤하면 잠들어 버리는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언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전화를 끊기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언니, 내가 아무 도움이 못돼서 미안해.”였다,
언니와 함께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생각해 본다. 정말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는가. 누구와 나눠야 절반이 되는가. 몇 명과 나눠야 절반이 되는가.
언니의 슬픔이 절반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니 무력감이 찾아온다. 아무리 해도 내가 나눌 수 없는 절반.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기도해본다. 언니 슬픔의 절반을 내가 가져올 수는 없지만, 슬픔으로 가득 찬 언니가 기댈 곳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