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의 『이별없는 아침』, 중앙일보사, 1984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지만 그러나 무엇인가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카프카를 믿으며 수니는 씩씩하게 걷고 싶었다.
과거를 홀홀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길은 그녀의 의지만큼 열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미 그녀가 거의 삶의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걸 알고 있기에 미리 예측한 슬픔이 무거운 안개처럼 바닥에 내려앉는다, 다소 진부한 장이다.
아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아이를 사이에 두고 고통을 떠안는 시간이 온다. 먹먹해지는 가슴속에는 어른들이 걷어낼 수 없는 아이의 운명 같은 통증만 남는다. 아이가 아프면 어른들은 무엇도 더 해낼 수 없다. 거기서 멈춰 서서 불가능한 바람에 속절없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고 만다. 타인에게 빌어올 수 없는 생명의 시간, 더 이을 수 없는 불가피한 단절은 예견된 고통이다.
사람을 떠나보낸 적이 있는 사람들이 만나면 이전의 허무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사람의 등에 '마지막 사랑'이라 쓴다는 것은 바라보는 등의 넓이만큼 가슴에 구멍이 났다는 걸 거다. 절절한 끝 남자에 대한 바람은 그 절절함 만큼 절망이 되고 만다. 진부한 드라마들이 항상 거치는 그 길처럼.
한 사람을 만나 삶의 절정을 이루는 가족이라는 기쁨을 느끼지 못한 사람의 결핍은 대체할 수 없다. 외롭기만 한 사람은 그저 그게 시작한 곳에서 머물러 살뿐이다. 대체 불가능하지만 평행선으로 견뎌야 하는 그녀와 또 다른 그녀와의 동거가 되는 것이다.
견딜 만 한가. 네가 낳지 않았으니 그런 거라는 모욕은 극복하지 못할 상처가 된다. 하지만 사실이다. 더 매달린다. 자신이 낳지 않았으므로. 수니는 진심으로 절망하며 희망을 바라보고 싶지만 타인의 시선은 온도가 형편없이 낮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공허의 시선은 평생 앓아야 하는 불치병이다.
'꽃 피지 않은 것에 대한 꿈들'이 가장 슬프다. 아이가 꽃 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공포다. 아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그 잔인한 슬픔, 아이로 인한 기쁨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의 깊이는 헤아리기 힘들다. 차라리 나에게 그 고통을...
내가 만일 다시 사랑해야 한다면
그가 내게 등을 보이며 눕는다면
내 심장이 공허로 뚫려 슬프다면
조용히 통곡하며 돌아 누워야지
그 통곡이 상처로 되돌아온다면
심장 저 깊은 곳에 아프게 남아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그저 머물지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