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눈이 되는 날에는

걷고 또 걷고

by 서희복

눈이 지팡이가 되는 거야. 툭툭 채이며 구르는 돌에 귀를 기울이며 한 걸음씩 나가다 보면 어느새 손이 스치는 벽돌 담벼락이 다 닳아 없어지고 말아. 점점 패이는 벽돌은 되돌아오는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하지만 어떤 날엔 걷고 계속 걷고 또 걷게 될 거야. 내 귀에 닿을 질문들이 메아리가 되는 때에 잠시 걸음을 멈추겠지.


잘 있는지. 여행은 어땠는지. 백만 개의 질문을 바닥에 펼쳐 두고 제일 먼저 엄지 발가락에 닿는 걸 집어 들어. 눈이 볼 수 없는 것은 발이 하고 발이 할 수 없는 건 손이 하니까. 필요 위에 불필요가 겹겹이 쌓이는 게 사는 거니까. 무엇이든 없어져도 어떤 것으로든 할 수 있지. 어떤 것은 무엇이 되었다가 눈앞에서 사라지곤 해.


볼 수 있다는 상상은 회색의 공포라서 안 보이는 시간을 채워야 하는 때가 오면 가만히 세상을 의지해 걷기 시작해. 손에 스치는 나무도 그대로 나무가 맞는 바람 소리도 그대로 물이 고인 늪의 끈적함도 그대로인데 보이지 않는 공간은 느릿한 시간이 되고 보이지 않는 색깔은 가슴으로 흘러들어 짙은 찌꺼기로 가라앉아서.


진눈깨비처럼 쌓이는 불안이 새하얗게 흐드러지는 날에는 자판을 타고 태어나는 기호들 속에 그 불안을 가득 넣어. 애착인형을 대신해 한 줌 글로 걸어 두는 거지. 심장 한 구석에 재로 남은 오늘 한나절을 떠맡기고.


내일은 새로운 날이 될 테니. 내일. 내 일. 보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