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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완 Jul 18. 2023

둥지에서의 몸부림, 그리고 떠남

둥지에서의 몸부림, 그리고 떠남

아직도 야생으로는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어

호수 초입에 둥지를 틀었는데 육지도 보이고 호수도 보여서 좋았거든

매일 일찍 일어나 신문도 읽고 둥지 꼭대기 층에서 필라테스도 하고

산책도 하고 그림 그려보겠다고 아이패드도 사서 찌끄려보고

외국어 공부한다고 학습지도 주문하고 좋았거든


너무 오래 머물렀나 봐 

서서히 곡식 창고가 비기 시작한 게 보이더라 

선뜻 차가운 호수에 발을 디디기 싫었는데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이 있었나 봐


이제 여정에 나서야 할 때구나 싶었어

육지로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

아직 미지의 호수로 뛰어들고 싶지도 않았어

그래서 최대한 둥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어


전화로 학습 상담하는 일도 해보고 번역도 해봤어

그러다 조금 자신감이 회복이 돼서

둥지에서 벗어나 학원에서 아이들도 가르쳐봤어

생각보다 할 만했어


어느 날 둥지 주인에게서 전화가 온 거야

아들이 들어오려고 하는데 계약 연장 안 하고 나가줄 수 있냐고

서울은 이미 집값이 2배 오른 뒤였어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나갈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셨어

나는 시골이 싫었어

태어났을 때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 내 고향이야 

무엇보다도 부모님 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선택권이 더 이상 없었어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한 달 만에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어

우리 집은 차 없이 시내에 나가기는 좀 멀어

걸어서 20분 정도면 시내 외곽까지 갈 수는 있는데

 서울처럼 도심에서 걷듯이 걷기 편하지가 않아 

같은 20분이라도 2배는 더 걸리는 느낌이지


그렇게 나는 잠을 자기 시작했어

이제는 밖에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아 

그저 현관문을 열고 부모님 차를 빌려 시동만 걸면 되는데

차를 타고 10분 나가기가 버거웠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신문을 읽고 꾸준히 가던 필라테스 루틴도 전부 사라졌어


둥지만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바뀌었어

100일 습관을 만들면 루틴이 된다고 한다는 말은 거짓이야

습관을 만들기는 어려운데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어


모든 게 멈춘 것 같았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

여기서는 몸부림 칠 것도 없는 것 같았어

그저 잠만 자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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