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시작
고향으로 내려온 뒤에
1년 간은 서로 적응하느라 힘들었어
오랫동안 나가 살던 자식이 다시 들어왔으니 안 맞는 게 당연한 거겠지
내 창고에 곡식만 충분했다면 진작에 뛰쳐나왔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억지로 '같이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어
그래도 먹고 자는 걱정은 안 해도 돼서 좋았어
더 이상 곡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어
어느새 가족끼리 소소한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어
지금까지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가족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어
육지를 떠나고 나서 심연의 바닥을 친 뒤에
어쩔 수 없이 깊은 내면을 파헤쳤잖아
그때부터 가족들을 미워하게 됐거든
나는 더 이상 가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거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둥지 주인에게 이사 가달라고 연락이 왔고
무언가에 떠밀리 듯 어쩔 수 없이 고향에 내려오게 된 건데
이 모든 일들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이루어진 걸까 싶었어
하루하루가 즐겁기 시작했어
곡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어
늘 비어있던 부모님 곡식 창고가 풍족해 보였어
자식이 걱정됐는지 새 곡식이 들어오면 종종 봉투에 담아서 주셨어
모든 게 다 부질없고 의미 없고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기적은 일어나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나는 치유되고 있었어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치유받고 있었어
우리는 서로를 치유해주고 있었어
정말 감사한 일이야
단 하루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