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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완 Jul 18. 2023

고향으로 내려가다

루저가 된 기분이었다 

어학원 파트타임 강사와 영어번역을 하면서 나름 보람을 느끼며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피스텔 주인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들이 들어와야 되는데 계약 연장 안 하고 나가줄 수 있냐고 하셨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시 임대차 3법이 시행되면서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면 집주인이나 가족이 들어와서 거주할 계획이 아닌 이상 계약 연장을 무조건 해줘야 하고 전세나 월세 금액도 인상률 5%로 제한해서 올려줘야 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쑥대밭이 되고 정부의 돈 풀기와 부동산 정책으로 서울 집값은 2배 넘게 급등한 상태였다. 집주인 입장으로서는 새로운 세입자를 받으면 전세든 월세든 금액을 훨씬 올려 받을 수 있으니 기존 세입자와는 계약갱신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4대 보험을 내지 않는 신분이기에 이사를 한다 해도 전세대출이 가능할지가 불투명했고 같은 전세 가격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오피스텔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내가 살던 오피스텔은 역에서 도보로 2분 거리였고 큰 대로에 있었으며 신축 2년 차로 풀옵션이었고 원룸이긴 하지만 복층이라 층간 소음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타고 옥상에 올라가면 잔디와 벤치가 있고 꼭대기 층에 필라테스가 있어서 편리하고 좋았는데 같은 금액에 이 조건을 다 만족하는 오피스텔은 인근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만 이사를 3번을 했는데 결국 처음 자리잡았던 동네로 다시 돌아왔고, 아는 지인 하나 없는 다른 동네로 가는 모험은 이제 안할 생각이었다.  


결국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아빠가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회사를 그만둔 건 계속 말 안 하고 있다가 해가 바뀌고 학습상담사를 시작하자마자 가족들에게 그만뒀노라고 말은 해 둔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시골이 싫었다. 문화생활의 혜택이 많고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서울을 동경했기 때문에 따분하고 심심하고 할 것도 없는 시골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사를 가면 더 좁혀서 월세로 가야 할 테고 지금 버는 수입으로는 생활이 너무 빠듯할 것 같았다. 아직 계약이 종료되려면 몇 달 여유가 있었기에 그때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생각을 굳히고 있었는데 아빠가 자꾸 전화해서 어차피 올 거면 빨리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수입도 변변찮은 자식이 안쓰러웠던 것 같다. 집주인에게 언제 전세금을 빼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은행에 확인해 보더니 바로 빼 줄 수 있다고 하더라. 아들이 들어와서 살 거라고 하는 집주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집이 내 집도 아니고 굳이 분란 일으켜 봐야 서로 좋을 것도 없기에 이사비용 100만 원을 받고 바로 집을 비워주기로 했다. 


학원이 문제였다.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야 하니 학원에서 들으면 얼마나 황당할까. 대체 강사를 구해주고 가는 것 또한 다른 문제였다. 그때 친하게 지내는 언니 한 명이 생각났다. 최근에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영어도 할 줄 알고 심지어 언니 집은 학원하고 더 가까웠다. 평소에 월수금 하루 4시간 영어강사로 일하는 걸 부러워했었던 게 생각나서 혹시 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좋다고 했다. 언니 영어 이름도 공교롭게도 나하고 같았다. 교수부장님께 사정을 잘 이야기했고 언니에게 인수인계를 해준 뒤 아이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학원도 그만두게 되었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집주인의 전화를 받고 이 모든 일들이 불과 한 달 만에 벌어졌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정신없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무슨 일이었을까 싶다. 뭔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고향으로 떠밀려 내려온 느낌이랄까. 


오랜 세월 나가서 살던 자식이 백조가 돼서 부모님 집에 들어왔으니 좋은 모습으로 귀환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건 부모님은 나를 전혀 창피해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빠는 그랬다. 엄마는 응원해 주다가도 가끔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못마땅해했지만. 오히려 나 스스로가 위축되었던 것 같다.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되었는지 고향에 내려온 날부터 밖에 나가지를 않았다. 그리고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경과 신문을 읽고 필라테스를 하던 루틴이 사라졌다. 성공한 사람들이 100일만 꾸준히 해도 습관이 된다고 했는데 더 오랜 기간을 해온 루틴도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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