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어도 잊을 수 없는 일
2000년대 후반 여름 8월 15일 몹시 볕이 뜨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더위는 별로 안 더웠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더위는 뭔가 기분 나쁘게 짜증 나게 덥다. 이렇게 더울 때면 항상 그날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바로 강도를 당했던 일이다. 살면서 강도를 당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내가 당했다.
때는 내가 고3이었을 때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하고 후회되는 때이다. 나는 학교에서 야자를 안 하고 독서실을 끊었는데 이때 참 지독하게 공부를 안 했다. 머리가 참 잘 돌아갔는데 친구들 따라서 이리저리 마음이 돌아다니니 눈에 공부가 안 들어왔다. 어쨌든 8월이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광복절이 휴일이지만 독서실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독서실은 꽤나 거리가 멀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옆 동네로 가야 했고 그 동네를 가기 위해서는 지하보도를 건너야 했다. 그 당시 지하보도에는 cctv가 없었다. 요즘에는 cctv는 기본이고 그림도 걸어놓고 클래식도 틀어주니 뭔가 나쁜 짓을 하기에 어려운 환경이다. 나는 집에서 공부를 안 해서 독서실을 무조건 가서 공부를 했다. 늘 집에 있으면 딴짓하거나 자는 것이 일이었다. 마침 부모님도 외출하셔서 사실 집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그 생각도 잠시, "그래도 고3인데... 공부해야지"라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책을 챙겼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참 수능의 중요성을 너무 몰랐다. 어느 대학을 갈 거라는 목표도 없고 대학의 이름이 나중에 취업을 포함한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냥 공부하면 고등학교처럼 대학교 가는 줄 알았고 나는 당연히 웬만큼 '괜찮은' 대학을 갈 거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저 눈앞에 내신 점수만 적당히 받으면서 살아왔기에 더 먼 미래를 보기란 어려웠다. 사실, 이건 지금도 겨우겨우 살아내는 나에게 먼 미래를 보기란 참 어려운데 그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갑자기 안 하던 공부를 하려던 생각이 잘못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볕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빠르게 지하보도 안에서 열을 식히고 싶어 서둘러 들어가고 지상으로 올라가려는데 저기 멀리서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내 바로 앞으로 지나가려는 듯 오고 있었고 나는 피해서 가려고 하다가 그 사람과 부딪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 갈려던 찰나에 뒤에서 "야!"하고 나를 불렀다. 나보다 키가 훨씬 작았기에 나름의 깡다구로 뭐지 나랑 해보자는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는데 정말 예상 밖으로 과도를 들고 나를 불렀다.
막상 칼을 보니 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정확한 말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대충 돈과 가진 것을 다 달라고 요구했고 나는 정말 주고 싶지 않아서 느릿느릿 지갑을 찾았다. 어차피 얘들이 나를 찌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 나는 그냥 주지 말고 튈까 하고 지하보도 위를 쳐다보았는데 더 작은놈 하나가 망을 보고 있었다. 일단 줘야겠다 싶어서 짜증을 내며 점심값 만원을 주고 가던 길을 멋대로 가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돈 주고 가려던 나도 참 이상했다. 그리고 다시 "야 그것도 내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듣고 있던 mp3를 가리켰다.
나는 지금도 그렇고 음악을 엄청 좋아해서 내가 정말 어렵게 구한 음악들을 모아놓은 mp3를 정말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줄 수 없었다.
"이거 어차피 오래된 거라 돈도 안돼요."
나는 매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말을 듣고는 망을 보던 작은놈에게 오라고 손 짓했다. 그러더니 이거 돈 되냐고 묻자 작은놈은 이거 고물이라는 말과 함께 갑자기 두 놈은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매우 분했다. 이런 대낮에 강도질이라니라는 생각과 함께 빼앗긴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다시 독서실을 가려는 데 차마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발걸음을 파출소로 옮겼다.
나는 파출소로 가는 내내 망설여졌다. 생전 처음 경찰관을 마주하는 것이고 말한다고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파출소 앞까지 오고 한 참을 문 앞에서 뱅뱅 돌며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은 의경 생활을 한 나에게 경찰관은 익숙한 존재이지만 그때는 참 뭐가 무서웠지 겁이 났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굳게 마음을 먹고 파출소 문을 당겼다.
활짝 열릴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 다르게 파출소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허무했다. 강도짓을 당한 것과 경찰서에 오기까지 20분이 안된 것 같은데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지 도저히 다시 독서실을 갈 수 없을뿐더러 공부가 안될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녁이 되어서는 엄마가 외출에서 돌아오셨고 밥을 해주셨다. 그냥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막상 엄마를 보니 속상한 마음에 쏟아져 나왔다. 엄마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더니 내 손에 만오천 원을 쥐어주시면 다행이라며 말씀해 주셨다. 나는 저녁을 먹고 그 오래된 mp3를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빼앗긴 돈을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