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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icial Kes Jun 09. 2020

저도 제 삶이 있습니다, 원색적인 비난은 삼가 주세요.

세상을 향해 뱉었던 나의 욕설

하극상을 아십니까? 그게 제 이야기입니다.

다들 단물 빨며 있을 때 저는 욕지거리를 한 움큼 베어 물었지요.

억울하기 싫습니다. 저도 고개 쳐들고 저 멀리 산방산을 보렵니다.

우뚝 솟은 석산만이 제 나쁜 말을 이해해주겠지요.

주먹다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싸웠습니다.

그 부산 놈 하나와 싸웠습니다.

아니 나는 소대원들과 싸웠습니다.

아니 저는 그 순간 세상과 싸웠습니다.

제주는 식생이 달라 바람 따라서 흔들거릴 버드나무가 없습니다.

여긴 숲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름의 세계입니다.

그 말인즉슨 버티는 게 아니라 솟아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제주 생활을 묻습니다.

잘 지내야 한다는 마음을 전하시네요.

전 말없이 전화를 끊습니다.

여기 별난 놈이 왔다고 토박이 벌레가 수군거립니다.

저는 영문을 모르고 묻습니다.

'무사?'

아! 저도 제주 방언 깨나 합니다.

이미 적응한 지 오래지요.

허나, 적응 못한 지도 오래지요.


나는 대정읍에서  의경 군 복무를 했다.

 최근에 이원하 시인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읽었다. 워크맨에도 잠깐 나오고 요즘 핫한 시인이라는 이야기에 인터뷰까지 찾아보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집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금세 이원하 시인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아주 견고한 성처럼 느껴졌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가 이원하라는 세계에 빠져드는 듯했다. 눈에 띄였던 인터뷰 내용은 6개월 동안 시를 쓰러 제주도에 내려가셨다는데 그 결심이 내심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나도 내려가고 싶지만 현실은 어려운 것 같고 그저 시집 제목의 제주에 꽂혀 나의 제주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시로 녹여봤다.


 경기도에서 나고자란 내가 제주도에서 2년 가까이 살았던 일이 있었다. 바로, 군대를 제주도로 지원하였다. 입대 전부터 나는 멀리 떠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중고등학교부터 입시까지 어떤 규칙에 의해서 속박된 나 자신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게 선배 후배 문화가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나의 기대는 무너진 게 아니라 바스러졌다. 그래서 육군훈련소 3주 차가 되던 때에 1 지망에 경기, 2 지망에 제주도, 3 지망 전남, 4 지망 경남을 적었다. 경기가 아니라면 그냥 완전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받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봤을 때 1 지망에 경기를 적은 것을 보면 망설임도 있었나 보다.


다시 가고 싶은 모슬포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수백 명의 훈련병들 중 제주도에 배정받은 5명에 속하여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동기들은 어떡하냐며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내 인생이 재밌게 돌아가는 것 같아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제주도에 도착하고 한 전경대에 배정받아 전경들과 같이 생활했다. 그 당시 전경 제도가 폐지되어 전경은 없어지지만 의경이 인력이 들어가 대체되는 과정에 있었다. 사실상 전경의 업무를 그대로 하는 것이니 큰 차이가 없었다.


 나는 군대 문화에 대해 정말 하얀 도화지였다. 기본적인 계급은 알고 있었지만 동기면 나이 무관하게 반말을 쓴다던가? 악습이 있다던가? 압존법을 사용한다던가?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 신기했던 게 같이 훈련했던 사람들 하나하나 군대에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듯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제주도 동기는 어떻게 그렇게 군문화에 빠삭하고 잘 적응하던지 어떤 일든 나서서 참여하고 나머지는 말썽 없이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적응해 가는데 깨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군대의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고 나는 19개월 내내 답답함을 호소했다.


답답할 때마다 중문으로 가서 먹었던 게짬뽕... 리얼 존맛....


 적응 기간 동안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활동하는 모습에 선임들의 눈에는 아니꼬운 후임이었다. 순응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나의 실수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상한 놈 취급을 했다. 내 태도가 반골같았던 것은 악습과 부조리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했고 선임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들 중에는 나와 영원히 상종하기 싫다며 말 조차 안 섞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몇몇 선임은 나의 이런 모습에 신기해하고 마음에 들어했다. 이유는 또라이 같아서였다.  


 그리고 또라이는 전입하고 세 달 정도 지났을 때 큰 사건을 일으켰다. 그때 발야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심판을 보았는데 한 선임은 내 판정을 몹시 마음이 들지 않아했다. 그 선임은 쉴 새 없이 욕을 해왔고 나는 무대응,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어차피 억울함을 호소해봤자 시나리오가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어코 게임이 끝난 이후에도 나에게 따지기 시작했고 나는 참을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곧이어 씨발 좆같게 하네라고 선임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나와 9개월 차이의 한참 선임은 적잖은 당황 후 엄청나게 흥분했다. 아마 이경 나부랭이가 자신이 욕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시하고 뒤돌아서서 생활관으로 향했고 그 선임은 계속 뒤를 쫒아오면서 화를 쏟아냈다. 욕설은 겨우 주변을 맴돌았지만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세상 전체를 향한 불만을 육성으로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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