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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n 20. 2020

감자튀김, 나에게는 부의 상징  

1997년, 호주 거지 시절을 회고하며  


호주의 대표적인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hot chips 감자튀김을 꼽겠다.


한국인이 하루에 한 끼는 꼭 밥을 먹어줘야 마음의 안정을 얻듯, 호주 사람들은 뜨겁게 튀긴 감자튀김을 먹어줘야 '아 오늘 하루도 든든하게 마무리했군’ 싶나 보다. 심지어 공원의 비둘기나 바닷가의 갈매기 조차도 새우깡 대신 감자튀김을 먹는다. 사람들이 먹다 남긴 감자튀김을 냅다 물고 달아나는 갈매기들을 보고 있자면, 호주 새들은 대부분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뜨거운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 감자튀김을 호주에선 핫칩스(hot chips)라고 부른다. 간혹 외국계 레스토랑이나 파인 다이닝을 표방하는 곳에서 가느다랗게 튀긴 감자튀김의 메뉴명을 프렌치프라이 French Fries 라 붙여놓기도 하는데, 손님이나 종업원 모두 아랑곳하지 않고 hot chips please ~ 로 주문을 주고받는다.


여럿이 함께 식당에 가서 '나는 별로 배가 안 고프니, 그냥 핫 칩스나 작은 사이즈로 하나 시킬게' 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스테이크에도 햄버거에도, 치킨 파미자냐(호주인들이 많이 먹는 치킨커틀릿에 치즈를 옮려 구운 요리)에도 메인 음식보다 더 많은 양의 감자튀김이 사이드로 듬뿍 뜸뿍 나와서, 식사를 마친 테이블에는 결국 감자튀김만 잔뜩 남겨지기 때문이다. 야외 테이블이 있는 레스토랑 주변에는 그래서 늘 새들이 많다. (호주 길거리의 새들을 모아 혈압을 좀 재봐야 할 텐데)


평생 다이어트를 해도 늘 퉁퉁한 몸매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감자튀김을 좋아한다. 지겹다 지겹다 하면서도 앞에 놓여 있으면 자꾸만 손이 간다.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져 짭조름하게 소금을 뿌린 두툼한 핫 칩스의 맛과 식감은 확실히 중독성이 있다. 어쩌면 호주의 감자튀김 조리 기술이 유독 뛰어난 것인지, 한 달 살기 손님 중에는 귀국 후 가장 생각나는 호주 음식이 감자튀김이라는 분들이 많다.


감자튀김에 뿌리는 소금은 크게 두 종류다. 치킨 솔트와 플레인 솔트. 치킨 솔트는 일반 소금에 치킨 맛 조미료를 첨가한 것이고, 플레인 솔트는 순수 고운 소금이다. 캔틴이라 불리는 매점이나 피시 앤 칩스 가게에서 핫 칩스를 시키면 What salt? 하고 묻는다. 그럴 땐 당황하지 말고, 치킨 솔트 또는 플레인 솔트라고 대답하면 된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플레인 솔트를 뿌려달라고 해야겠지만, 감자튀김 먹으면서 건강까지 따질 거 있냐?라는 생각이시라면 치킨 솔트도 시도해보시라. 호주 아이들은 감자튀김을 다 먹고 나면 침 묻은 손가락에 치킨 솔트를 꾹꾹 찍어 쪽쪽 빨아먹는데, 감자튀김을 그 맛에 먹는다는 애들도 있다.


감자튀김 얘기가 나왔으니, 호주 감자튀김에 얽힌 나의 한 맺힌 사연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때는 1997년. 내 나이 만 스물한 살 때 호주로 첫 배낭여행을 갔다.


수중의 돈 100만 원 중 왕복 비행기 값 80만 원, 나머지 20만 원을 환전해 브리즈번에서 케언즈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레이 하운드 버스 패스를 사는데 약 150불을 쓰고, 하루 지난 식빵에 피넛버터만 발라먹으며 백패커스에서 이틀을 묵고 나니 남은 돈이 50불 남짓 되었다.


그 돈을 가지고 6개월을 지내야 하는 상황. 말이 배낭여행이지 그냥 호주에서 거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농장에서 일을 하면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얘기를 듣고, 김피 Gympie라는 지역으로 향하는 길.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잠깐 섰는데, 그때 내 눈에 번쩍 뜨인 컵에 담긴 핫 칩스! 삼시세끼 피넛버터 바른 식빵만 먹다가, 노릇노릇 고소한 향기를 풍기는 감자튀김을 눈앞에 목격하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2.50



- 하나 사 먹을까?

- 내가 지금 감자튀김 사 먹고 다닐 처지냐?

- 당분간 농장에서 일하면 돈 쓸 일도 없을 텐데.

- 사람일을 어떻게 알아? 무조건 아껴야지.

- 지금 못 먹으면 앞으로 계속 못 먹을 것 같은데...

- 그건 그럴지도....



휴게소 정차 시간 내내 감자튀김 가게 앞을 기웃거리며,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는 결국 속으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커다란 컵에 담긴 따끈한 Hot chips를 사버렸다. 당시 이휘재가 삶의 기로에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는 인생극장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내가 20년 전 마음속의 외침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무겁고 어려운 결정이다는 뜻일 게다.


소중한 감자튀김을 두 손으로 모시듯 들고, 남은 버스 여행은 감자튀김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야지! 하며 룰루랄라 버스에 오르려는데, 문 앞에 서 있던 버스 기사님이 팔을 쭉 뻗으며 너 같은 애들은 이제 지겹다는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No food allowed. Put them in that rubbish bin"



뭐? 노... 푸드? 러...러...러비시 빈?

쓰레기 통에..... 버리라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정신이 아찔했지만, 절대 감자튀김을 버릴 수는 없다는 집념이 발휘되어 순간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화장실에 친구가 있어요. 주고 올게요."


곧 출발하니 얼른 다녀오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장실로 냅다 뛰어가 배낭에 감자튀김을 고이 담았다. 나의 순발력과 기지에 감탄하며 천연덕스럽게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기사 아저씨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인 줄 아느냐는 듯 나른한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가방을 가리키며 "Open your bag"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부당한 일이다. 버스 내에서 음식 먹는 걸 금지할 수는 있지만, 가방 검사까지 해가며 감자튀김을 결국 뺏고야 마는 것은 지나친 처사 아닌가. 그때 순순히 가방을 열어 감자튀김을 뺏길 게 아니라 "버스 안에서 안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 당신이 무슨 권리로 가방을 검사하냐."라고 항의라도 해 봤다면 어땠을까?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가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좀 더 현명한 대처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아끼고 아끼다 결국 한 개도 못 먹고, 옆에 있던 쓰레기 통에 내 손으로 버릴 수밖에 없었던 감자튀김.


처참하고 허무한 마음을 가눌길 없이 터덜터덜 버스에 올라, 멍하니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았다. 매정하고 나른했던 버스 기사 아저씨는,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이제 버스가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을 했다.


아직 식지도 않은 채 쓰레기 통 속에 산산이 흩어져 있을 나의 감자튀김을 뒤로하고 버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의 출발과 동시에

앞 좌석에 앉은 커플이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지금 지겨울 때까지 감자튀김을 먹고 남은 것은 새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재력가가 되었다.


정말이지, 이만하면 꽤 성공한 인생 아닌가.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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