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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n 14. 2020

스티브 잡스보다 내 삶이 낫지.

마흔다섯 중간 점검


앞으로 브런치에 나의 성공 스토리를 써보려 한다.


나는 자산 100억 이상의 부를 일군 사업가도 아니고, 수준급으로 요리나 정리를 잘하는 살림의 여왕도 아니다. 똑 부러지게 아이를 키워 아이비리그에 보내지도 않았고 (아직 어려서 앞날은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 하는 꼴로 봐서는 그럴 리가 없다.)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연예인도 아니다. 사회에 대단한 공헌을 했거나, 엄청난 역경을 딛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이야기를 쓸 것이고, 언젠가 책으로 출간할 수 있게 되는 날도 기대하고 있다. 지구촌 쓰레기 문제가 심각한 이때에 종이 쓰레기를 늘리는데 한몫하는 대신 많은 사람들의 책장에 소중히 자리 잡게 하려면 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텐데...


성공스토리를 쓰려면 일단 성공을 해야 한다. 아직까지 내 이야기를 책으로 내겠다는 꿈조차 꾸지 않은 것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어도 위에 열거한 모델 중 뭐 하나라도 해당되어야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갚아야 할 대출금도 잔뜩인 주제에 자서전을 쓰겠다는 허황된 꿈일랑 냉큼 접고, 정신 차리고 일이나 열심히 하자!라는 것이 불과 어제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무도 없는 타운하우스 공용 핫 풀에 앉아 바람에 야자수가 부딪치는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자니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야. 글을 써.



계시라도 받은 듯 두근두근 설레었다. 핸드폰으로 가이드 명상을 틀고 물속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10분간 주시한 후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한다.  

"이마 가운데에 의식을 두세요. 이마 앞 공간에 환한 빛이 퍼집니다. 무한하게 퍼져나가는 빛 속으로 미래의 내 모습이 보입니다. 꿈꾸던 내 모습을 바라보며 그 기쁨을 충만하게 느끼세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행복감에 빠집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지금 부족한 것이 없다. 행복하고 감사할 것들 투성이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더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믿으며, 불만과 요구가 가득 찬 마음을 저 안에 감추고 '나는 감사하다. 나는 감사하다.' 거짓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나는 이만하면 성공적인 삶이라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로 태어나고 싶고,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지금처럼 살고 싶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원래는 좀 살았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망했다고 뻥을 치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만, 사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쭈욱 가난했다.


먹고사는 일이 급급하다 보니 우리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대학을 가기보다는 하루빨리 취직해서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셨다고 한다. 먹고살만해진 최근에 과거를 회상하며 뒤늦게 하신 고백이지만, 나는 진작에 부모님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속이 깊어 4년제 대학에 일부러 떨어진 건 아니지만, 재수를 할 궁리는 꿈도 꾸지 않고 취직 잘 되는 전문대에 들어가 일찌감치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보통 사람들이 15세에서 17세 사이에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나는 20세에서 30세까지 겪은 것 같다.


남들은 못 들어가 안달인 좋은 직장을 4개월 만에 그만두고, 시급 이천 원짜리 알바를 전전하며 클럽 죽순이, 배낭 여행자를 가장한 외국 거지, 무역회사 여직원, 아이돌 댄스그룹 매니저, 라이브클럽 매니저, 성인 사이트 운영자 (페미니스트와 성적 소수자, 개방적인 여자들을 꼬드겨 한 번 잘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 남자들이 섞여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10년이나 운영했다.) 등등 한마디로 재미는 있지만 딱히 돈이 되지 않고, 부모님 지인들이 "따님은 요즘 뭐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우물쭈물하게 만드는 일만 골라서 하며 10년을 살았다.


나와 별 반 다를 바 없는 처지의 (한마디로, 망해도 본전인) 남자와 함께 장사를 시작하고, 모텔비를 아끼려 결혼을 했다.(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 이유였다.) 첫 아이를 낳고, 생활고와 모유수유와 부부싸움에 지쳐 이혼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우리는 아이를 위해 마지막 보루로 뉴질랜드행을 택했다. 한국을 떠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목수가 된 남편과 다섯 살이 된 아들, 둘째를 임신한 몸을 이끌고 알거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문 열면 바로 길이 나오는 부엌도 없는 집에서 벗어나, 마당 있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목표 하나로 1,500만 원을 빌려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했다. '

여유로운 삶을 원한다면 숙박업은 반드시 기피해야 할 업종이다'라는 교훈을 얻고, 2013년 제주에 내려가 임대업자가 되었다. 낡은 펜션을 빌린 후 순전히 청소를 한 달에 한 번만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리고 숙박업보다는 임대업자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한 달 살기 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홍보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한 달 살기가 대 유행이 되어, 졸지에 국내 최초 한 달 살기 집 운영자라는 영애를 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4년 만에 총 42세대의 타운하우스를 개발하고 분양한 업체로 발전했다. 지금은 분양한 집의 일부를 한 달 살기 집으로 운영하며 제주와 호주 골드코스트 두 곳에 집과 사업체를 두고 있다.


진지하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부자 마인드를 가르쳐 준 롤모델도 없고 변변한 학벌이나 스펙도 없고, 불타는 열정과 성실함을 겸비하지도 않은 나와 남편이 이루어냈다고 하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성취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결과에 이루는 과정에서 참거나 뒤로 미루거나 희생한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갖은 고생을 했다. 마음과 몸이 힘든 시절도 있었고 미래가 불안할 때면 다 때려치우고 취직해서 적금을 부으며 살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늘 결론은 불안하고 궁핍해도 시간을 내 맘대로 쓰는 삶을 포기하지는 말자는 거였다. 웬만하면 일을 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고, 하기 싫은 일은 신속하게 잘라내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일 하느라 아이들과의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하는 운동회나 참여 수업에조차 웬만하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 저녁엔 늘 가족이 함께 밥을 먹으려 노력한다. 통잔 잔고를 탈탈 털어 여행도 다니고, 책을 읽거나 요가를 하고 이렇게 글을 쓸 시간도 늘 있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 남겼다는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살만큼 부를 쌓은 뒤에는 부와 무관한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것은 더 중요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아마도 인간관계, 예술, 또는 젊은 시절의 꿈같은 것 말이다. 쉬지 않고 부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나처럼 뒤틀린 인간을 만들 것이다.


앞으로도 쭈욱 사업체를 운영할 것이고, 더 큰 목표를 이루고 싶은 야망도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 과정에서 내 영혼이 거부하는 일을 억지로 하지도, 가족과의 시간을 뒷전으로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은 물론, 남편, 아이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며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을 천천히 즐길 것이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인생 전반에 걸쳐 두루두루 만족할 만한 삶을 사는 것은 정말 창의성과 고집과 신념이 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나는 죽으면서 내 삶을 후회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 그래서 나는 위대한 혁신을 이루어 낸 스티브 잡스나 그 어떤 대단한 사람들 못지않게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만하면 성공 스토리를 쓸 자격이 있지 않은가?



2020년 6월 14일 아침,

명상 중 영혼의 계시를... 이를 테면, 삘을 받은

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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