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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Oct 12. 2024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벌써 8년이나 됐나? 그녀가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채식주의자를 구입하러 서점에 갔다. 책을 펴 들었다가, 두 세장 읽어보고 덮었다.


그래 놓고서, 나는 글을 다 읽은 척했다. 몇 페이지 읽다 만 주제에 마치 한강 작가에 대해 아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무겁고 어둡고 시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별로야.'라고 말했다.


나는 때때로 그런 식이었다. 몇 마디 대화로 마치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다 아는 것처럼 고개를 성급히 끄덕였고, 첫인상과 내 자의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해석했다. 심지어, 그런 식의 판단을 함부로 글과 말로 옮기며 잘난 척의 도구로 삼았다. 똑똑한 척, 독창적인 시각을 가진 척, 취향이 확실한 척, 척 보면 척인 척... 무지하고 오만했던 시절이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며 너무 고통스러워 매일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일종의 앎이 있었기에 계속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그녀만의 통과의례를 거치는 동안 나는 나 대로의 삶을 겪으며 무언가를 통과했을 것이다.


그 시간을 건너 온 지금의 나는 조금 변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 불평 없이 <채식주의자>를 읽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어둡고 눅눅하다 생각했던 글이, 고통을 피하지 않는 전사의 글처럼 힘 있게 와닿을지도 모른다. 오글거린다 생각했던 문장이 아름답고 초연한 관조의 시선으로 읽힐 수도 있다. 글은 그대로지만, 독자인 나는 변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나를 볼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인 것 같다. 읽는 시점에 따라, 감정 상태에 따라, 경험과 사유의 깊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읽힌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글 속에서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보았다고 평했다. 그렇게 심오한 경지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사람들을 보면 '와'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그 덕분에 뭔가 오기 같은 게 생기고, 한강의 작품을 다시 한번 시도해보고 싶어진다.


이번엔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그나저나 지금은 책을 구할 수가 없네. 이 기세를 몰아 독서 인구가 늘어나길.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팔리길.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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