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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l 11. 2020

차를 마실 때는 차를 마시자


아침에 우연히 보이차를 10년 넘게 즐기신다는 지인의 블로그 포스팅을 보았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사치품,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있는데 그분께는 그것이 일 년에 두 번, 오랜 기간 숙성된 명품 보이차를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8년 전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사를 갔던 해에 아이 학교 학부모로 알게 된 분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작은 시골집에 빼곡하게 들어 찬 책과 생소한 다기들이 참 인상적이었죠. 시간을 들여 물을 끓이고, 다기를 덥히고, 물을 다시 적당한 온도로 식히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던 시간. 처음 경험해 본 '다도'는 아름다운 명상 의식처럼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좋았으면 당장 다도에 입문했을 법도 한데, 다기 세트를 한 바탕 구입하고 차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왠지 나와는 안 어울리는 일 같고,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 또한 없었습니다. (가끔 전통 찻집에 가는 건 좋지만, 늘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되는 건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후로 차를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성격이 급해 티백 홍차를 우릴 때도 종이 꼭지를 잡고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여 빨리 우러나게 만듭니다. 색이 좀 우러났다 싶으면 티백을 버리고 뜨거운 홍차에 차가운 우유를 살짝 넣어 떫은맛을 잡고, 후딱 마시기 적당한 온도로 만들죠. 이 모든 과정이 30초도 안 걸립니다.


그런 저에게, 아침마다 의식처럼 보이차를 즐기신다는 <글 쓰는 워킹맘>님의 블로그 글이 오늘 '땅'하고 머리를 친 겁니다.


워킹맘이 명품 가방보다 좋아하는 것

https://boronia.blog.me/222027569929



저는 금사빠입니다. 마음에 훅 와 닿는 아이디어나 글을 보면 금세 혹하고 찬양하며 실천하는 편입니다. 대부분 얼마 못 가 시들해지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살아남아서 제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요가나 명상, 소리 내어 책 읽기, 매일 뭐라도 쓰기 같은 거.


의식처럼 차를 마시는 행위-다도에 관해서는 살면서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듣고 글도 보아왔지만 잘 마음에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저도 차분히 앉아 오로지 차를 마시는 일에 집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얼마 전 읽은 몇 권의 책도 분명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디아)', '살 빠지는 뇌 (구가야 아키라)'등 마인드풀니스 Mindfulness 관한 책을 읽었거든요. 마인드풀니스란 100% 현재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죠.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에 집중하고, 길을 걸을 때는 발의 감촉과 공기의 흐름에 집중하고, 샤워를 할 때는 몸에 닿는 물살의 감각을 즐기는 겁니다.


<살 빠지는 뇌>에는 건포도 한 알을 집중해서 먹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을 태양의 빛과 포도의 향, 혀에 닿는 달콤한 맛과 쫄깃한 식감을 느끼면서 건포도를 먹는 겁니다. 뇌과학 전문 의학박사이기도 한 구가라 아키라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왜 음식을 먹는지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 건지, 음식이 앞에 있어서인지,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심심해서인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먹는 식행동을 고치는 것이 건강한 몸을 만드는 기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뭐 맞는 말인 건 알지만, 그게 잘 될까?' 하는 회의적인 마음이 들어 후루룩 대강 읽고 말았는데, 책의 여운과 <글 쓰는 워킹맘>님의 보이차 찬양글이 합쳐져서 오늘은 티백이 아닌 잎차를 천천히 마셔보고 싶어 진 것입니다.




주방 선반을 열어보니 작년에 골드코스트에 오신 레이지마마 손님이 선물해주신 제주 올티스 유기농 홍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주에선 맛볼 수도 없는 귀한 선물인데 제대로 향과 맛을 음미하며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차를 마실 때도 책을 읽거나 팟캐스트를 듣거나 수다를 떠느라 차 맛에 집중하지 못했죠.


집에 있는 티팟이라고는 다이소에서 $2.80 주고 산 싸구려뿐이었지만, 그래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차를 우렸습니다. 끓인 물을 5분쯤 식히고, 적당한 양의 찻 잎을 덜어 거름망에 넣은 후 물이 골고루 충분히 닿도록 조금씩 뜸을 들여가며 쪼르르 쪼르르 붓습니다. 물에 닿은 홍차잎에서 은은히 풍겨 오르는 쌉쌀 고소한 향기를 그동안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4분으로 타이머를 맞춰두고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티팟과 세트로 산 다이소 티 컵도 있지만 너무 금방 뜨거워져서, 잡음 새가 좋은 카푸치노 잔에 홍차를 따랐습니다. 깊이 우러난 색을 바라보고 향을 맡고 천천히 한 모금 넘깁니다.



차를 마실 때는 차만 마시기.



핸드폰을 늘 한 손에 들고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익숙해진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책도 없이 그냥 앉아 차를 마시자니 심심하기도 하고, 후딱 마시고 빨리 컴퓨터 앞에 앉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릅니다. 조바심을 달래기 위해 크게 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차를 마실 때는 차만 마시기를 하다 보니, 허기가 느껴져서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기도 실천하고 싶어 졌습니다.



저희 집은 밥 먹을 때 핸드폰이나 TV 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신 음악을 틀고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제 노력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식탁을 빨리 탈출하기 위해 씹지도 않고 엄청 빨리 밥을 먹습니다. 그럼 저도, '아이고, 대화는 무슨... 후딱 치우고 나도 쉬어야지' 하며 부지런히 먹는 속도를 맞추거나, 아이들이 먼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쓰윽 몰래 핸드폰을 꺼내 듭니다.


오늘은 책에서 읽은 '왼손으로 밥 먹기'를 해 보았습니다. 구가야 아키라 박사가 밥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기 위한 전략으로 제안한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감자와 양파, 버섯, 애호박과 두부를 넣고 싱겁게 끓인 된장찌개에 밥을 말았습니다.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부치고 싶었지만 그냥 심플하게 먹자고 나를 다독입니다. 보통 이렇게 음식을 국물에 말아먹으면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후루룩 먹어치우게 됩니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왼손을 사용해 젓가락으로 건더기를 집고, 숟가락으로 밥과 국물을 뜰 때도 흐르지 않게 주의하다 보니 자연히 식사 속도가 느려지고, 먹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끓여서 적당히 무른 야채를 부스러지지 않게 집어 올리는 손가락 힘의 강도, 그렇게 집어 올린 야채가 입에 안착했을 때 느껴지는 향과 맛, 국물과 함께 간신히 당도한 평소보다 적은 양의 밥알들.


음식을 천천히 입에 넣으니 씹는 속도도 그에 맞게 느려지고, 오래 씹어 삼킨 음식이 몸에 채워지는 감각을 느끼려고 노력하니, 생각보다 금세 배가 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된장국 한 그릇을 다 못 먹고 남기다니요. (어쩌면 홍차를 많이 마셔 물 배가 찬 걸 지도...)


사실 매 끼니를 이렇게 천천히 먹을 자신은 없습니다. 평생 '빨리빨리 먹고 치우자'라는 소리를 듣고 산 사람이 하루아침에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죠. 하지만, 오늘의 경험을 통해 저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차를 마실 땐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을 땐 밥을 먹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질이 훨씬 좋아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상을 할 때 계속 잡념이 파도처럼 몰려오지만, 그것을 응시하고 다시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나를 통째로 사로잡지는 못합니다. 그렇듯이, 나의 먹고 마시는 행동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몸에 해롭고 불필요한 음식들을 무의식적으로 집어넣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차를 한 잔 정성 들여 마셨을 뿐인데,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일을 하는 하루의 일상에 그 차분한 마음이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한 페이지의 글 덕분에 지구 반대편에 사는 제가 이렇게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카오루 님.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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