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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l 12. 2020

남의 집 아이가 우리 집에서 피가 철철 나게 다쳤을 때

호주에서 아이 키우기


2018년 4월 11일 오후 다섯 시는 그야말로 악몽 같았다. 아이 둘 키우고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지만, 이 날 만큼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일을 411 사태라 명명하여, 두고두고 기억하며 마음에 새길 작정이다. 오늘은 그 날의 경험을 이야기해보겠다.




우리 가족은 2017년 6월에 호주로 이사를 했다. 이사 올 당시 열두 살, 일곱 살 두 아들이 할 줄 아는 영어라고는 헬로, 바이 바이, 1부터 10까지 숫자 세기 정도가 전부였다. 학교에서 멀뚱멀뚱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알아듣는 말이 늘긴 했지만, 소통이 되지 않으니 친구를 사귀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그나마 큰 아이는 축구를 하니 좀 나은데, 둘째 서율이는 하교 후 집에 오면 친구도 없이 집에 콕 박혀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그런 아이가 안쓰러워 어떻게 친구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 고민만 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던 차, 길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리길래 나가봤더니 서율이 또래의 아이들이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며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서율아! 밖에 친구들 많다. 너도 나와서 자전거 좀 타!" 했더니, 밖으로 뛰쳐나간 아들이 금세 동네 아이들을 집으로 몰고 들어왔다.

이런 경우 호주 부모들은 어떻게 대응하는지 모르지만, 그냥 집으로 들이면 안 될 것 같아 집에 가서 엄마에게 우리 집 주소를 알려드리고 잠깐 들어가서 놀아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오도록 했다. 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나 찾게 만들면 안 되니까.

서율이가 아직 아이들과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좋아하는 영화 스쿨 오브 락 School of Rock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틀어놓고 함께 춤을 추거나, 마당에서 공을 차고 놀며 처음 만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참 대견했다.


얘들아! 부디 매일매일 놀러 오렴


아이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Wii 게임할래? 드럼 한번 쳐 볼래? 하며 놀이 뒷바라지에 만전을 기하다가, 급하게 이메일을 보낼 일이 있어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마당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려 뛰어 나가 보니, 제이콥이란 아이가 왼쪽 이마를 움켜쥐고 있다. 이마를 덮은 손가락 사이에선 새빨간 피가 팔목을 타고 바닥까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서율이가 어렸을 때 철제 계단에서 굴러 턱이 쩍벌어지게 찢어졌을 때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던 것 같다.


부모 얼굴도 모르는

처음 만난 남의 집 아이가

우리 집 마당에서

서율이가 휘두른 골프채에 이마를 맞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이, 상황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다친 부위부터 살폈다. 다행히 눈은 아니다. 눈썹 약간 위 왼쪽 이마가 2~3cm 정도 깊게 파인 것 같은데, 피가 많이 나와 상처가 얼마나 깊은 지는 살필 겨를이 없다.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제이콥의 동생 케일럽에게 얼른 가서 부모님을 모셔오라 하고, 놀란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욕실에 데려가 지혈을 하고 눈에 보이는 피를 닦았다. 상처 부위를 꾹 누르고 아이를 진정시키고 있는데, 케일럽이 모셔오라는 부모님은 모셔오지 않고 동네 애들을 잔뜩 끌고 왔다. 엄마에게 가다가 동네 형들을 만났는데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단다. 하아....


케일럽은 신이 나서 동네 형들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제이콥은 우리가 집으로 데리고 갈게요. 놀다 생긴 단순한 사고예요. 괜찮아요." 하며 오히려 나와 서율이를 안심시켰다. 바싹 얼어 울지도 못하고 서 있는 서율이에게 "It's o.k. Just accident!"라고 말해주는 아이들! 천사 같은 아이들에게 제이콥을 넘겨주고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고맙다. 고마워." 하며 아이의 집을 찾아 나섰다. 아이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고 속상해할까? 걱정되는 마음을 가득 안고.


잽싸게 먼저 뛰어간 케일럽이 이미 상황을 알렸는지, 문 앞에 제이콥의 아빠, 엄마가 나와 있었다.


"우리 애가 골프를 치다가 옆에 있던 제이콥이 이마를 맞았어요. 아무래도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하고 울먹울먹 설명하니, 그들은 바로 "아이들끼리 놀다가 벌어진 사고예요. 괜찮아요."라고 했다. 아이의 상처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아이가 놀랄까 봐 그런 건지 차분한 목소리와 표정을 잃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놀다 벌어진 사고든 일부러 때린 것이든, 남의 집 귀한 자식 얼굴에 상처를 낸 가해자의 부모이니 백배사죄하고, 병원을 함께 따라가는 정성을 보이고, 치료비며 검사비를 배상하는 등의 방법으로 아이 부모의 마음을 달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호주.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물었다. "정신이 없으실 텐데, 제가 병원에 함께 가지 않아도 될까요? 검사를 받거나,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은 제가 내고 싶어요."


제이콥의 아빠 엄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런 사고로 가면 병원비는 공짜예요. 그리고, 놀다 보면 아이들이 다칠 수 있죠. 괜찮아요."

그래도.... 너무 미안해서.... 제가 아이들을 더 잘 봤어야 하는데....

구구절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빨리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 일단 빨리 병원에 다녀오시라고 한 뒤 집으로 향했다.

서율이가 길 한가운데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다. 동네 형들이 데리고 와 줬나 보다.

"서율아 너도 많이 놀랬지? 일부러 때린 게 아니고 놀다 벌어진 일이니까 괜찮아. 대신, 골프채 가지고 놀 때는 주위를 잘 살피고 엄청 조심해야 되겠다. 서율이가 모르진 않았을 텐데,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을까?" 하니 서럽고 놀란 마음이 폭발했는지, 서율이가 그제야 대성통곡을 한다. 울음소리를 들은 제이콥의 동생 케일럽이 와서 "왜 우냐? 괜찮다. 꿰매면 된다."며 서율이를 달랬다. ㅠㅠ


그날 밤,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아이가 머리를 다쳤으면 어떻게 하지? 상처가 깊으면 어떻게 하지? 밤새 토를 하거나 응급실에 실려간 건 아닐까? 호주 교민 사이트부터, 구글 검색에 이르기까지 '남의 집 아이가 우리 집에서 다친 경우'에 관련한 비슷한 사례들을 검색해서 읽다 보니, 걱정에 걱정이 더해져 근심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날이 밝은 대로 찾아가 아이의 상태를 묻고 다시 한번 사과를 해야지. 그런데 정확히 무엇에 대해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지?

'위험한 골프채를 가지고 놀도록 허락해 준 제 잘못입니다.'

'옆에서 아이들을 지켜봤어야 하는데, 깜빡 한 눈을 팔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늘 주위를 살펴서 놀도록 했어야 하는데,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어요.'

우리 집에서 아이가 다쳤으니, 뭔가 사과를 하긴 해야 하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을 잘 못 했다 말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하고 100% 진심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돈을 받고 아이를 봐주다가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집 안팎으로 들락거리면서 노는 네다섯 명의 아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지켜보기도 힘든 일이고, 어린이용 골프채를 발견하고 쳐보고 싶다며 가지고 나간 것은 제이콥이고, 서율이가 시범을 보여주다 일어난 사고라고 하는데....

'어른의 관리 감독이 필요한 위험한 물건을 눈에 뜨이게 두고, 그것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미쳐 보지 못한 제 불찰이에요.'라고 하면 정확할까?

그런데, 그게 과연 사과의 말로 들릴까?




호주 사람들은 보통 아침 여섯 시면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들 방학 시즌에 너무 일찍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여덟 시 반쯤까지 기다려 제이콥네 집을 방문할 참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밤새 함께 걱정하던 남편이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기쁜 얼굴로 소식을 전한다.


"제이콥이 서율이한테 같이 놀자고 집 앞에 와있어. 이마에 반창고를 하나 붙였는데 괜찮대. 오늘 또 골프를 쳐도 되냐는데? ㅎㅎㅎㅎㅎ"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뻔했다. 밖으로 달려 나가, 제이콥에게 이마는 어떠냐? 잠은 잘 잤냐? 토할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냐? 병원에서 상처를 꿰매었냐? 꿰맬 때 안 아팠냐? 너 여기 온 거 부모님이 아시냐? 모르시냐? 폭풍 질문을 하였으나 아이는 그저 골프를 또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관심사였다.

생각보다 상처는 깊지 않았던 것 같다. 꿰매지는 않고, 의료용 글루를 바른 뒤 반창고를 붙였다고 했다. 겁은 났지만 이젠 안 아프고, 잠도 잘 잤다고 한다. 서율이랑 또 놀고 싶어서 엄마에게 허락받고 왔다며, 오후에는 친구네 집에 가기로 해서 오전밖에 시간이 없으니 같이 놀면 안 되냐고 한다.

한번 꼭 안 아라도 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제이콥과 케일럽에게 가장 좋아하는 맛 아이스크림이 뭔지 물은 뒤 동네 배스킨라빈스를 가서 선물할 아이스크림 세 통을 샀다. 아이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걸 알았으니, 의례적인 사과는 생략하고 "어제 많이 놀라셨겠다. 아이들도 고생했을 것 같아,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라고 했다.


제이콥의 아빠, 엄마는 민망할 정도로 놀라고, 고마워하며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다치고 깨지는 일이 다반사다. 당신 아들이 우리 집에서 다칠 수도 있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아이 얼굴이 다쳤고, 속상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 나에게 냉랭하게 대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의 관점과 반응이 감사하고 감동적이었다. 함께 넓은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이웃들이 있는 마을이라니!

호주 부모들은, 아이들의 사고에 대해 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나?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아 좋은 이웃을 만난 건가? 궁금한 마음이 들어, 큰 아이 축구 클럽의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이 아름다운 미담을 늘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부모들의 하나같은 반응이었다.

"애들이 놀다 그런 건데,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나?" "집에 놀러 온 아이가 다쳤다고 해서 내가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남의 집 아이들을 초대하고 싶겠어?" "내 아이가 나가서 다치는 게 싫다면, 집에서 내보내지 말고 부모가 졸졸 따라다녀야지." "간혹, 유난을 떠는 부모들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아이들이 놀다가 벌어진 사고에 대해 서로 책임을 묻거나 하진 않아."

"그래. 그래. 맞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면서도,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이 떠올라 왠지 기분이 씁쓸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민 생활. 때로는 가족과 친구가 보고 싶고, 문화적 차이로 당황하고, 익숙한 것들이 그립지만, 넓은 마음과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부모들이 많은 덕분에 호주에서 아이 키우기는 훨씬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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