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희 Aug 15. 2020

연애 4.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동강 갈까?"

"거긴 왜?"

"트래킹 하러. 1박 2일."

"그래, 좋아”


J는 고등학교 때 자신이 산악부였음을 강조했다. 알아서 다 준비할 테니 나는 그냥 몸만 오면 된다고 했다.  '이 남자 꽤 듬직한데?' 하고 내심 기뻐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속옷과 칫솔 하나만 떨렁 들고 여행길에 나섰다.


강원도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그의 1993년식 자주색 세피아에서는 장거리 주행의 안전이 염려되는 냄새가 났다. 포니2 정도 되는 오래된 택시에서 날 것 같은 냄새랄까? 엔진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곰팡이 냄새 같기도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가 진한 커피향 방향제와 섞여 에어컨 바람과 함께 코를 강타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싶었지만, 혹시 그의 마음에 상처라도 될까 봐 나는 그저 묵묵히 코가 마비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오래전부터 후각을 상실한 게 분명한 J는 아련한 표정으로 몇 년 전 내가 녹음해 준 카세트테이프를 틀었다.  


그대 고운 두 눈은 맑은 호수.

파란 하늘이 있는 것 같아.

그대 고운 미소는 싱그런 바람.

살며시 내 맘을 스쳐가네요.


이문세의 명곡 '그대'였다.  


마셨다 하면 코가 삐뚤어지고 필름이 끊기던 시절의 내가 만취한 상태로 J에게 프로포즈를 하며 건넨 노래다. "우리 결혼하자"라는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는 그는, 다음 날 내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며 프로포즈를 취소하자 한동안 종적을 감췄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이 노래를 들으며 나를 원망했을까? 미안한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올라, 이제 그만 창문을 열어 싱그런 바람을 맞고 싶은 간절한 욕구를 다시 한번 꾹 억눌렀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위치한 동강은 래프팅이나 대학생 MT 장소로 인기 있는 곳이다. 하지만, J가 나를 끌고 간 동강은 내가 아는 그 동강이 아니었다.  민박집과 슈퍼마켓이 있는 마을을 지나, 상류의 래프팅 탑승장도 한참 지나 영월군이 정선군으로 바뀌는 지점이 나왔다.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꼬불꼬불한 외길로 접어든 후에도 그는 하염없이 차를 몰고 들어갔다.


이런 곳이라면 납치를 당해 숲 속 어딘가에 버려져도 수세기 후에나 발견되지 않을까? 이 남자는 도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안 것일까? 차가 갓길로 빠질까 봐 긴장했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J의 모습에서 진한 남자의 향취가 느껴졌다. 이제 내 생명은 이 남자에게 달렸다.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숲길 끝에 다다르자 공터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 곳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나무판자와 비닐하우스용 파란 비닐을 조합해 얼기설기 만든 가건물이었지만, 라면과 부탄가스, 껌, 빼빼로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엄연한 가게임이 분명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J의 지시에 따라 운동화 끈을 조이고 배낭을 멨다.  알고 보니 이 곳은 일종의 선착장이었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널 것이며, 강을 건넌 후 본격적인 트래킹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Why? 왜?

도대체 Why?


트래킹을 가자고는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트래킹을 할 줄은 몰랐다. 대강 걷는 시늉이나 좀 하다가 상쾌하게 샤워를 하고, 바베큐와 맥주를 즐기며 낭만적인 강원도의 밤을 즐기게 될 줄만 알았다.


J는 커다란 산악 배낭을 꺼내 짊어졌다. 설마 숙소가 저 강 건너에 있는 건가? 강 건너에 사람이 살긴 사는 건가?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그는 트렁크에서 텐트로 추정되는 가방과 침낭 뭉치를 꺼내 들었다. 절망이 밀려왔다. 나는 이 곳에서 그와 함께 오지 탐험을 하게 되는구나. 어쩌면 저 곳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이 아닐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출처 : 강원도 여행포탈 http://tour.gwd.go.kr)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그래 좋았어. 젊음의 패기로 한 번 걸어보자!' 질끈 마음을 먹고, J의 가방 꾸러미를 나눠 들었다. 마음을 달리 먹으니 에너지가 샘솟는 것도 같았다.


가게 앞 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니 반짝반짝 빛나는 짙고 푸른 강이 나왔다. 태초의 자연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강 건너편을 병풍처럼 둘러싼 기암절벽과 바닥의 자갈이 그대로 비치는 물을 바라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J는 다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앞장을 섰다. 건너편에 계시던 뗏목 아저씨가 배와 연결된 줄을 잡고 슬슬 다가온다. (위 사진은 정선읍 동강 풍경이지만, 그때 그곳은 아닙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고 카메라도 없었더래서 남겨둔 사진이 없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뙤약볕에서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 중인 군인에게 "그래도 이렇게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지내니, 얼마나 좋냐?"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최소, 들고 있던 총의 개머리 판으로 한대 맞게 될 확률이 높다. 한여름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으며 텐트 보따리를 짊어지고 하염없이 자갈길을 걷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가 땀과 함께 섞여 돌연 슬픔으로, 외로움으로, 인생무상으로 모습을 달리하며 점점 뇌를 마비시켜갔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지오디 GOD 노래 '길'의 후렴구를 머릿속으로 백번쯤 흥얼거렸을까. 저 앞에 작은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엔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밭도 있고, 집 주변과 마당에는 닭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어디선가 나타났다. 반가움과 수줍음, 호기심이 동시에 배어있는 표정으로 아이들은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아, 강 건너 이 곳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었구나. 그래서 선착장에 가게가 있었구나.


신기루라도 본 듯이 감격하는 나에게, J는 신이 나서 그 집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애들이랑 전에 여기로 트래킹을 왔거든. 남자 세 놈이 아무도 음식 싸 올 생각을 안 한 거야. 배가 너무 고파서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이 집 마당에 닭이 있는 걸 봤어. 혹시 백숙을 삶아서 파실 생각 없냐고 물어봤지. 닭은 삶아줄 수 있는데, 닭 잡을 사람이 없으니 정 먹고 싶으면 직접 잡으라는 거야. 그래서 어떡해? 할 수 없이 내가 총대를 맸지.


...... 아, 당연히 한 번도 안 잡아 봤지. 나 서울 안암동 출신이야. 닭 잡을 일이 어디 있어. 근데 다들 못 한다하고, 배는 너무 고프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닭을 잡아서 모가지를 비틀었어. 한 바퀴, 두 바퀴를 돌려도 푸드덕거려서 한 바퀴를 더 돌렸던 것 같아. 죄책감도 들고 손에 힘도 풀려서,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탁 놨는데 목이 핑글 핑글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가는 거야.


....... 어, 살아있었어. 생명이라는게 참 끈질겨. 아줌마는 이미 솥에 물을 팔팔 끓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나도 못 하겠더라고. 푸드덕거리는 토종닭에게 사죄하고 막 놓아주려던 참이었는데, 때 마침 읍내 가셨다던 주인아저씨가 돌아오신 거야. 아저씨는 칼로 순식간에 목을 따셨어. 인정사정없었지만, 닭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렇게 깔끔하게 죽여주는게 더 고마웠겠지.


....... 맛이 있었냐고? 나는 이게 설마 닭인가 했어. 아줌마가 닭 대신에 고무줄을 넣은 거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니까. 죽으면서 얼마나 힘을 썼는지 그렇게 질긴 백숙은 세상에서 처음 먹어봤어. 닭 입장에서는 제대로 복수한 셈이지."


.


그의 아름다운 추억을 들으며 한바탕 웃고 나니,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주변을 뱅글뱅글 맴도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마치 꿈속에 서 있는 것처럼 잔잔하게 감동마저 밀려들었다.

이 곳에도 학교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학생수가 모자라 한 두해 전에 폐교되었단다. 덕분에 몇 집은 정선 읍내로 이사를 나가고, 몇몇 아이들은 남아서 매일 강을 건너 통학한다고 했다. 지금은 방학이라 집에 있는 거란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쭈뼛 대면서도 아이들은 낯선 이의 등장이 반가웠는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집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띄엄띄엄 몇 개의 집이 더 나오고 정말 학교 건물이 보였다.



왠지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나지 않나요? 지금은 먼 추억이 되어버린 이 학교는 우리가 다녀가고 난 뒤 2003년 영화 <선생 김봉두>의 배경이 되었답니다.


J는 운동장 한켠에 수돗가가 있으니, 이 곳에 텐트를 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만 걸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짐을 풀고 싶었지만, 밤이 되면 엄청 무섭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폐교에는 자고로 귀신이 산다던데.... 캠핑 전문가처럼 구는 J에게 왠지 쫄리기 싫어, 무섭겠다는 말은 못 하고 자연스럽게 운동장 여기저기를 돌아봤다. 다행히 수도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도 닦고 밥도 지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텐트 대신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겠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는데, J는 쓰윽 배낭을 둘러메고 당연하다는 듯이 강가로 향했다. 강물 한쪽에 샘 물이 솟아 나오는 곳을 알고 있으니, 거기서 물을 받아 마시고, 밥도 하고, 찌개도 끓이면 된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강.


시조가 절로 나오는 병풍 같은 풍경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 바닥을 고르고 텐트를 쳤다. 친구에게 빌려왔다는 텐트는 2인용이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1인용으로 보였다. 삼각형 지붕만 있고 벽은 없는 형태로서, 그 안에 누울 수만 있고 허리를 펴 앉을 수는 없는 텐트였다.


샘물을 길러 밥을 짓고, 감자와 고추장을 풀어 찌개를 끓였다. 물 맛이 좋아서였는지, 고행 끝에 먹은 밥이라 그런지, J와 함께여서 그랬는지.... 밥 맛이 꿀 맛이었다. 우리는 코펠과 함께 강물에 몸을 푹 담그고 앉아 설거지를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해방감이 느껴졌다.


저물어 가는 붉은 하늘빛과 반짝이는 물 빛 사이에서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


배가 불러서였을까? 그가 참 멋있게 보였다. 소탈하고, 필요한 것만 간소하게 지니며, 건강하고 당당한 이 남자. 자연을 있는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이 아름다운 청년 J는 나와 함께 이 그림 같은 풍경과 추억을 나누고 싶어 험하고 먼길을 또 한 번 왔구나.


참으로 감사하고, 낭만적인 해 질 녘이었다.


서로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어둠이 몰려들기 전에는.


한 밤중에 요동치는 대장의 아우성을 잠재우기 위해, 칠흑같은 어둠과 날짐승의 울음소리를 뚫고 홀로 사투를 벌여야했던 시간 전에는.



(다음 편에 이어서....)



- 리즈 -












작가의 이전글 1500만 원을 빌려서 게스트하우스를 창업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