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컴컴한 새벽. 주차 전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것만 같은 골목 어귀 오래된 건물 3층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요가원보다는 바둑 두는 기원이나 소방감리 사무실에 더 어울릴 법한 건물이다. (실제로 그 건물 2층에 소방감리 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유리창에 고딕체로 붙인 <하타 요가원. 요가, 운동, 명상>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제대로 찾아왔군.'
계단을 오르는데 벌써부터 숨이 찬다. 긴장을 한 건지, 체력 탓인지 모르겠다. 그냥 집에 갈까? 마음은 내내 머뭇거리면서도 몸은 여전히 계단을 오르고 있다. 끼익 하고 철문을 여니. 바닥 전체에 깔린 초록색 매트가 눈에 들어온다. 긴 형광등이 두 개 자리에 하나씩만 달린 낮은 천장. 요가원에서 봄직한 거울도 매트도 없다. 혹시 여긴 태권도장인가?
맞은편에서 얼굴이 하얀 여자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선생님이신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물으니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한다. 구석으로 생각되는 자리에 앉아 경건하게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을 했다.
"저기 가운데 앉으신 분, 사람들과 줄 맞춰 앉습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어라? 비어 있던 공간에 어느샌가 사람들이 들어차 나를 중심으로 2열 종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까 그분은 선생님이 아니고 먼저 와 있던 수련생 중 한 분이었다.
요가인들답게 다들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첫날부터 고문관 노릇을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뻔뻔해지고 있는 내가 이깟일로 과하게 당황하는 것은 고참 지정석에 얽힌 아픈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때는 2010년, 동네 수영장의 아쿠아로빅 교실에 등록한 첫날이다. 선생님이 물 밖에서 음악에 맞춰 동작을 보여주면, 학생들이 조회 대형으로 물속에 서서 따라 하는 형식이었다. 나는 분명 맨 뒤에서 시작한 것 같은데 부력 막대에 둥실둥실 몸을 의지하며 정신없이 따라 하다 보니 어느덧 맨 앞으로 나가 있었다. 출산 직후 빠른 시일 내에 체중을 돌려놔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던 시절이라 과하게 동작을 크게 한 게 화근이었다.
수업을 마친 후 수영 모자와 물안경을 벗고 목욕탕에 가서 반신욕을 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아줌마들이 단체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는 누구야? 못 보던 여잔데 왜 맨 앞에 나와서 설쳐대? 자기 알아?" "몰라. 나도 첨 봐. 신나서 혼자 앞으로 막 나가더라."
'저기요. 제 얘기하시는 것 같은데요, 여기는 뭐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나요? 처음 왔으면 모를 수도 있지, 그게 뭐 죽고 사는 문제라고 단체로 뒷 담화를 해 댑니까?' 물론 이 말을 소리 내어 하지는 못 하고 머릿속으로만 우물댔다. 심지어 나와는 무관한 일인 듯 유유히 탕에서 빠져나와 사우나로 몸을 숨겼다.
아줌마들이 많이 모이는 곳, 아쿠아로빅, 에어로빅, 댄스교실 같은 곳에는 늘 이렇듯 암묵적으로 배정된 고참 자리가 있다. 요가원에서 내가 첫날부터 멋모르고 앉아 있던 자리는 그냥 고참석도 아니고 선생님이 앉아 시범을 보이는 자리였기에 강한 민망함의 여운은 수련이 시작된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부디 요가인들의 아량이 하해와 같기를….
‘반다사나. 파스치모타나 아사나!' 피부가 구릿빛이고 팔뚝에 문신을 새긴 여성 분이 카리스마가 뿜뿜 뿜어져 나오는 낮은 목소리로 지시어를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외계어를 당연히 안다는 듯 구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척척 몸을 반으로 접는다. 눈치를 보며 나도 후다닥 몸을 반으로 접었다. ‘바즈라사나. 비라사나. 숩타비라사나' 이건 또 뭐지? 이번에도 사람들은 착착 무릎을 꿇고, 무릎은 붙인 채 종아리만 벌려 그 사이로 엉덩이를 내려놓은 뒤 바닥에 등을 대고 눕는다. 허벅지가 당기고 허리가 아프지만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호흡을 깊게 하며 통증을 바라본다.
하타요가는 한 동작을 길고 깊게 하는 요가다. 내 몸이 구부리고 꺾을 수 있는 최고점을 찾아내, 그 한계를 초연히 바라보고 호흡을 통해 동작을 한끝 한끝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잘하는 사람과 비교하기보다는 내 몸을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한계점을 찾아 충분히 호흡하고 호흡이 거칠면 그대로 유지, 편안해지면 아주 조금씩 동작을 깊게 해 나간다. 그러려면 균형을 잡아야 하는 몇 가지 동작 빼고는 가급적 눈을 감고 내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산스크리트어 지시어로 수업이 이루어지고, 인간의 몸이 어떻게 저렇게 되나 싶을 정도의 동작을 척척 해내는 무림고수들이 가득한 요가원에서 나 같은 초보들은 눈을 감을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나를 새벽 요가원으로 이끌어준 D 선생님이 맞은편에 앉아 계셔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방향감각이 떨어지는 나는 왼쪽 오른쪽을 헷갈려 계속 허둥대고 바둥대며 첫 수업을 마쳤다.
잘란드라반다, 웃짜이, 차크라, 알다우르드바다누라, 살람바사르방가사나 등, 외계어가 난무하는 수련을 몸을 달달 떨어가며 마치고 나니 시작할 때의 민망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뒷담화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운동이 끝나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며 수다를 떠는 에어로빅 아줌마들과는 달리 새벽 요가인들은 수련이 끝난 직 후 소리 없이 각자의 갈길로 흩어졌다.
세 사람만 모이면 그룹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남 얘기를 하기 마련인데, 새벽 요가에서 만난 사람들은 굳이 그룹에 끼는 것으로 존재감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요가를 다른 운동과 확연히 구분 지어주는 특징이 있다면 그중에 하나는 바로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요가는 시작부터 끝까지 외부가 아닌 나의 내부을 들여다보는 과정이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집중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아가 단단한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운동이다. 반대로, 요가를 하면 자아가 단단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섬처럼 굳건한 사람들이 모여 한 시간 동안 함께 호흡을 나누고 조용히 각자의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광경이라니. 첫날부터 새벽 요가에 강한 매력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