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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Oct 22. 2021

오징어게임 코스튬, 꼭 입어야겠니?

소심한 엄마의 일기


아이가 모아둔 용돈으로 오징어 게임 감시자 코스튬을 사겠다고 난리다. 안된다고 하니 그럼 초록색 참가자 추리닝을 사겠단다. 그것도 안 된다고 하니 틈날 때마다 '왜요? 왜 안 되는데요?' 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오징어 게임 내용을 생각해봐. 얼마나 잔인하냐. 최악의 상황에 몰린 사람들 목숨을 놓고 누군가 장난치며 노는 거잖아."

"그래서 왜요."

"그런 나쁜 사람들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거 별로야."

"그럼 참가자 옷으로 살게요."

"아들이 그렇게 비참한 사람들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야."

"아, 왜요? 그 옷 입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닌데."

"암튼 내용이 너무 잔인하잖아."

"할로윈에는 원래 나쁜 놈들 분장을 하잖아요. 좀비나 흡혈귀나 괴물 같은 거. 근데 오징어 게임 감시자는 왜 안돼요?"

"글쎄 안돼. 이제 그만 말해."

"왜요? 왜? 도대체 왜요?"


아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할수록 내 말에 진정성도 설득력도 없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궁색하다. 차라리 그냥 솔직해지자.

 

"아들이 오징어 게임 코스튬 입고 다니면, 엄마 욕먹어."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눈치 보지 말고 자기 소신대로 살아야 한다고 평소에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놓고선, 고작 이게 아들의 "왜요?"에 대한 대답이라니. 하지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결국은 그게 가장 사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징어 게임 1회를 보고 펑펑 울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터졌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슬픔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처절함과 추억의 놀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오버랩된 장면. 오버스럽게도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방바닥의 개미를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일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우리 인간들의 무심한 얼굴, 킥킥대며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다 보면 각종 기괴한 사건 사고를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자극적인 스토리에 끊임없이 노출된 우리의 심장은 이제 웬만한 장면으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나 역시 그랬다. 피 흘리는 장면을 보며 밥을 먹고,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도 곧 평화롭게 잠들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건 요즘 요가를 너무 열심히 한 탓일 수도 있다. 삶에 요가를 끌어들이고 나면 자극에 취약해진다. 좋아하던 순두부가 너무 짜게 느껴지고, 돼지갈비에서 난데없이 피비린내가 느껴져 먹기 싫어지기도 한다. 그렇듯, 뿌연 필터를 통해서 봐오던 인간사의 불편한 지점에 쨍한 조명을 비추는 것 같은 오징어 게임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보는 내내 불편했다.  


하지만, 내가 감정적 불편함을 느꼈다고 해서 아들에게까지 드라마를 보라 마라, 코스튬을 입어라 말아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 미성년자이니만큼 아이가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해줄 의무는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예술 작품에까지 내 잣대를 들이대어 아이의 눈과 귀를 막고 싶지는 않다. 열두 살이면 어느 정도 분별력과 나름의 생각이 있을 테니, 무작정 못 보게 하기보다 함께 보며 감상평을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할로윈에 오징어 게임 코스튬을 입는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들 말대로) 그렇게 따지면 프랑켄슈타인이나 좀비, 흡혈귀 분장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들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내 소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보는 마음 때문이다. 사실, 얼마 전 SNS에 올라온 한 엄마의 글과 그 글에 공감하는 좋아요, 댓글을 보지 않았더라면 "네 용돈이니까. 네가 알아서 사."라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에게 오징어 게임 참가자 옷을 사입히고, 귀엽다고 인스타에 올리는 엄마들은 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드라마 속 끔찍한 배역의 의상을 아이에게 입히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유행하는 드라마를 그저 재미 측면에서 바라보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도 과하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며 코스튬을 입고 다니면 자랑스러워하면서, 아이들이 그러고 다니면 엄마를 욕하는 것도 그리 균형감 있는 여론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나는 여론이 무섭다. 동네 엄마들의 입방아가 무섭다. 이 찌질한 마음을 인정하기 싫어 아들의 "왜요?" 공세에 "글쎄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하는 허접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인스타 보니까 애들이 오징어 게임 옷 입고 다니게 했다고 그 엄마를 욕하더라. 너도 그 옷 입고 다니면 동네 엄마들이 뭐라 할지도 몰라. 엄마 욕 먹이면서까지 꼭 입어야 하는 건지 잘 생각해봐. 서율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요. 욕하더라도 대 놓고 하지는 않겠죠."

"뒤에서 욕하면 괜찮아?"

"안 들리는데 어때요? 상관없죠. 뭐."

"아......! "

세상을 참 쉽게 사는 아들의 낙천적인 정신에 나는 솔직히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그 말도 맞다고 인정하면 또 조르기를 멈추지 않을까 봐 나는 한 번 더 단호하게 솔직한 내 마음을 전달했다.
"엄마는 뒤에서 하는 말이라도 남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을 자신이 아직 없어."

"왜요?"

"하아..."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함께 자란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 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아이의 집요함은 '너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스님들의 선문답처럼, 진짜 내 안의 소리를 듣게 해 주기도 한다.  


아이는 결국 엄마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드래곤볼 의상을 주문했다. 나일론으로 만들어진 헐렁한 반팔이라 그것만 입고있으면 감기 걸리기 딱 좋다고 경고를 했는데, 어제 저녁 내내 신이 나서 입고 다니더니 결국 콧물을 줄줄 흘리며 잠이 들었다. 그냥 눈 딱 감고 기모 달린 456번 추리닝을 사줄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 소심 엄마,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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