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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Dec 27. 2021

좌석번호 4K, 첫 경험

난생처음 내 돈 주고 비즈니스 클래스를 탔다.


법인 종부세 고지서를 보고 나니 그간의 검약 정신이 다 덧없이 느껴져서였을까? "대표님이 비즈니스를 타야, 나중에 우리 직원들도 비즈니스를 타 보죠!"라는 직원의 한 마디가 머리에 밟혀서였을까? '이코노미 타고 10시간만 고생하면, 그 돈으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식의 가난한 사고 패턴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려면 경험에 아낌없이 투자하라는 조언을 실천해보기로 했다.


서울-리스본 왕복 전 구간을 비즈니스로 클래스로 예약한 것은 아니다. 코로나 시국이니 당연히 비행기가 텅 비었을 것 같아서 당초엔 이코노미석을 예약했다. 이륙과 동시에 네 칸짜리 좌석 팔걸이를 싹 올리고 바로 드러누울 심산이었다. 그런데 왠 걸 서울-파리 구간은 좌석의 3분의 2가 찼고, 파리-리스본 구간은 거의 만석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좌석을 옮겨 다니는데도 제한이 있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갈수록 비행 후 컨디션 조절이 힘들어진다. 비즈니스 클래스가 비즈니스 클래스인 이유는 비행 후에도 바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가보다. 앉은 자세에서 차렷 자세로 17시간 경유 노선을 비행하고 나니, 9박 10일간의 일정 중 소중한 하루를 오직 컨디션 회복에 힘써야 했다.


귀국할 때는 리스본-암스테르담-서울 노선이었는데, 리스본-암스테르담 구간은 이코노미로, 암스테르담-서울 노선은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를 했다. 리스본-암스테르담 구간은 열당 좌석 6개의 국내선 급 기종으로 비즈니스와 이코노미 좌석 사이즈 간에 차이가 거의 없어서 굳이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서울 업그레이드 비용은 1인당 73만 원 정도.


일부 구간만 업그레이드해도 비즈니스 전용 카운터, 공항 프리미엄 라운지 등을 리스본 공항에서부터 이용할 수 있어서 왠지 큰 이득을 본 느낌이었다.


처음엔 그걸 몰라서 엄청나게 길게 늘어선 사람들 틈에 줄을 서 있었다.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니 비즈니스 전용 카운터로 가라고 해서 바로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남는 시간 동안 공항 프리미엄 라운지를 이용했다. 샴페인과 신선한 생과일주스를 포함한 각종 음료와 샌드위치, 샐러드, 따뜻한 요리 등이 모두 공짜라고 하니 아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도 급 흥분이 되었지만, 컨디션 유지를 위해 샴페인을 마시는 대신 탄산수를 마시고 명상을 조금 했다. "이런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슬리퍼로 갈아 신고 얇은 담요 대신 고급스러운 누비이불을 펼치고 앉아있자니 승무원이 주스와 샴페인을 배달해준다.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청소년 아들이 사진 찍히기를 마다하지 않고, "너도 성공해서 비즈니스 타고 다니라"는 내 말에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반짝반짝 빛나고 손끝에서 고급스러운 무게감이 느껴지는 청량한 커틀러리로 하얀 도자기 접시에 담긴 코스 요리를 먹었다. 수브니어 파우치에 담긴 칫솔마저 모가 촘촘하고 탄탄하면서도 부드럽다. 총승객수는 얼마 안 되는데 화장실은 세 개나 돼서  다음 사람에 대한 부담 없이 이를 닦을 수도 있다. 복도가 아닌 내 좌석에 그대로 서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등받이와 다리받침을 130도로, 180도로 조정해가며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서진이와 나는 이라크 어느 시골마을의 버스에서 막 내리는 참이었다. 엄청난 군중이 서로를 밀치고, 서진이는 급하게 화장실을 가고 싶다며 동분서주했다. 한국 전쟁 직후를 연상시키는 이 마을 어디에서 화장실을 찾나, 오늘 밤은 도대체 어디에 묵어야 하나, 우리가 무슨 실수라도 해서 마을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하는 근심에 휩싸였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몇 걸음 안에 화장실이 있고, 아들이 화장실에 갈 때 내가 몸을 돌리거나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도 되는 비즈니스 클래스였다.


꿈에서 깨니 꿈같은 현실이다.


주변을 보니 비즈니스 클래스에 처음 타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인 듯했다. 다들 무심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거나, 비스듬히 앉아 영화를 브라우징 하거나,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를 조용히 클릭하고 있었다. 들뜬 표정으로 수브니어 키트를 열어보거나, 리모컨이 터치 패드도 된다며 감탄하거나, 전동으로 작동하는 의자를 이리저리 눌러보며 앉았다 누웠다 하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나도 '한 두 번 타보는 것도 아니고.... '하는 지루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무엇보다 사진 찍고 싶은 열망을 참을 수가 없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 비행기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나와 울 아들이다. 이 순간의 감사함을 가장 많이 느끼는 것도 우리 두 사람이다. 우리도 언젠가 이 모든 호사에 익숙해져서 따분한 표정을 지을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이 첫 경험의 찬란한 순간을 함께 고생한 남편과 함께 누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비행기에서 내리기 싫은,

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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