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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Feb 15. 2022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렴


인생이 계획대로 가는 것이라면 지금쯤 우리 가족은 포르투갈에 있어야 한다. 큰 아들은 리스본 축구 클럽의 입단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고, 학교에 다녀온 둘 째는 적응하기 힘든 학교 급식과 새로운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부을 것이다. 나와 남편은 더듬더듬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렌트한 집의 인터넷이 한 달째 개통되지 않는 것을 해결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을 보러 갈 때마다 고기와 빵과 야채가 한국의 반값도 안 되는 것에 대해 감탄을 거듭하고, 값싸고 질 좋은 와인과 에스프레소의 세계에 빠져 몽롱한 낙천주의자로 빠르게 현지화되어 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인생은 우리를 영종도로 불러들였다. 80대인 시부모님들과 70대인 친정부모님들이 살고 계시는 곳이다. 8년 전 우리 가족이 제주도로 떠나기 전 약 2년간 영종도에 살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했었다. 그때 친정부모님이 아이 키우는 걸 도와주러 잠시 이사를 하셨다가 아예 정착하셨고, 뒤를 이어 시부모님도 서울의 집을 팔고 영종도로 이사를 하셨더랬다. 공기 좋고 주거 환경 좋고, 서울을 오갈 때 공짜 지하철의 혜택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는 동네.


불과 3년 전만 해도 일주일에 몇 번씩 서울을 오가시고, 복지관 활동도 활발히 하시던 시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코로나 이후 경로당도 각종 모임도 없어지고 하루 종일 집에 계시는 시간이 길어져서였을까? 간간히 통화할 때마다 점점 목소리에 힘이 없어지시고,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시는 일이 생기더니 뇌출혈과 함께 치매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중학교 3년을 호주에서 다니다가 갑작스럽게 한국에 와서 애매하게 고등학교 축구부 생활을 하고 있는 큰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유럽으로 이주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없다고 남편은 단호한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못 본 척한다고, 별 거 아닌 것처럼 군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연로하신 어머님과 직장 생활하는 미혼의 시동생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우리만 잘 살겠다는 듯이 떠난다면, 남은 여생을 내내 편치 않은 마음으로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영종도에 있다. 큰 아들은 경기도 지역 기숙사가 있는 축구 클럽에 입단해 국가대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고 (^^), 남편과 나와 작은 아들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북적북적 오랜만에 대가족 생활을 하고 있다. 늘 낯선 도시의 이방인으로 살던 우리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어울려 지내니 감회가 새롭다. 특히 하루 종일 집에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노년의 삶을 체험하다 보니,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도 티브이는 집에 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지금도 그러면 좋지만 노년에는 특히 도서관과 산책로가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 디지털 문맹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 요가와 명상을 죽을 때까지 이어가며 어떤 상황이 닥쳐도 행복과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는 할머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남편과 더 사이좋게 지내야겠다는 생각.


친정집엔 조용한 공간이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게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다. 하루 종일 틀어 놓는 동계 올림픽 중계방송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시골집 정화조 청소를 한 날짜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부모님들의 입씨름 사이에서 이렇게 글을 쓴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찬 가운데 아침저녁으로 30분씩 명상도 한다. 명상하는 엄마의 등을 킥킥대며 발가락으로 쿡 찌르는 아들에게도 짜증은커녕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실로 오랜만에 대지에 딱 뿌리를 내리는 듯한 안정감. 부모님은 어느덧 자식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나이가 되셨지만, 마음은 왠지 내가 보살핌을 받는 듯하다. 시아버지의 치매는 우리 가족의 삶을 생각지 못 한 국면으로 접어들게 했다. 어찌보면 고난일 수도 있는 이 상황이 나는 왠지 큰 선물인 것만 같다.


배에 차 싣고 육지행. 어디에 살던 행복합니다.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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