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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아침 Oct 13. 2024

나의 신화 1 - 첫소풍과 김밥

나의 신화 1 – 첫 소풍과 김밥


1902년, 프랑스에서는 이때 처음으로 지문을 범죄자 식별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축구클럽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박열과 정지용, 유관순이 태어났다. 그리고 제주도 서쪽의 어느 중산간 마을에 신화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태어났다. 


고신화. 


범죄자를 판별하는 현대적인 기법이 도입되고, 최고의 명성을 지닌 축구클럽이 만들어지고, 대한민국의 역사가 살아있는 한 기억하게 될 어떤 사람들이 태어난 그 때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마지막 회고가 될 존재, 고작 나의 신화가 되는 것이 그녀의 가장 먼 생애가 될 존재, 나의 할머니, 나의 신화가 태어났다. 


할머니라는 존재는, 불리는 그 순간부터 온 생애가 할머니일 뿐이다. 나는 그녀가 할머니가 아니었던 시절을 알지 못하고, 그녀가 아이였던 시절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다. 


태초에 할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만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던 시절이 있었다. 여섯 살부터 여덟 살까지였던가. 


마당을 나서 올레를 통과한 다음, 한 달음에 바다까지 지치지도 않고 뛸 수 있는 나이였다. 온종일 바다에서 놀았고, 발가벗고 헤엄을 쳤다. 해질녘이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할머니가 나타나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반은 벗고, 반은 입은 채로 할머니의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 폭탄과 함께 귀가했다. 바다로 가는 길은 가까웠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없이 멀었다. 


집에 도착하면 툇마루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제주식 냉국은 된장을 풀어 만든다. 제주에서만 그렇게 먹는다는 사실은 아주 늦게 알았다. 할머니의 요리솜씨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무엇이든 많이 만들어주었던 기억은 난다. 우영팟에서 뜯어온 한 움큼의 상추가 전부인 상차림이었던 것도 기억난다. 상추에는 달팽이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된장 냉국에 상추쌈, 이렇게 차려진 식단이 예닐곱 아이가 먹기에 적당한 음식인가 아닌가, 그런 질문은 지금에나 유효한 것이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음식이 문제가 된 건 전적으로 학교 때문이다. 


초등학생들 사이에 퍼지면 그것이 진짜 유행이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는 바야흐로 문화의 폭발기였다. 그때의 중요한 문화적 키워는 명랑이었고, 독재의 시대에 명랑만한 포장지가 또 없었다.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떠있고 강물에는 유람선이 흐르는 대한민국 방방곡곡 ‘국민’학교에서는 명랑운동회가 열렸고, 소풍의 문화가 본격화 됐다. ‘바깥’이라는 세상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1983년, 나는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여덟 살 손녀는 명랑을 넘어 맹랑했다. 소풍 가는 날, 꼭 오뎅을 넣은 김밥을 싸달라고, 그래야 맛있다고 할머니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냈다. 그때 여든이 넘은 제주 촌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실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일까. 할머니는 태초부터 있는 존재이고, 그때의 나에게는 할머니 밖에 없었는데. 


나는 웃을 때나 당황할 때 얼굴이 일그러지는 할머니 특유의 표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는 명절에 쓸 떡을 하러 방앗간에 갔다가 방앗간 벨트에 얼굴이 갈리는 사고를 당했고, 이 때문에 웃을 때도, 울 때도 언제나 우는 얼굴이었다. 


기억하기로는, 그때 할머니는 오뎅을 구하지 못했다. 마트가 없던 시절이었고 장을 보려면 날짜에 맞추어 먼 곳의 오일장으로 나가야 했다. 할머니는 끝도 없이 걸어서 오일장에 갔다가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끝내 첫 소풍을 떠나는 손녀에게 오뎅을 넣은 김밥을 싸주지 못했다. 


당시에는 아이들의 소풍에 엄마들도 따라오곤 했다. 동네 운동회가 온 마을의 축제였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깨끗한 치마저고리를 동여맨 할머니가 우는 지 웃는 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만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어려운 과업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할머니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머니가 미웠다. 제주에서는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를 두고 ‘패롭다/패랍다’고 한다. 나는 그날 할머니에게 패라운 아이가 되었다.  


소풍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던가. 친구들의 엄마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할망이 막 김밥 어떵 싸는 건지 들어보멍 댕겨라게.”

(“할머니가 김밥 어떻게 싸는지 물어보러 다니시던데.”)


할머니는 여러 아이를 낳았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다들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삶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상실과 다르지 않았다. 신화가 낳은 자식들 중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가 나의 엄마이고, 신화가 기른 마지막 생명체가 바로 나였다. 


1983년 봄, 그때 그 소풍이 나에게만 첫 소풍이었을까. 여든 한 살의 고신화에게도 첫 소풍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할머니와 소풍을 가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명랑한 포장지조차 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이런 사실들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나는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는 38년이 되었다. 


#1980년대 #외할머니 #소풍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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