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방어형 포켓몬
마누의 집 앞엔 오래된 공원이 하나 있다. 낡은 골대 앞에서는 몇몇 아저씨들이 공을 차고, 그려진 트랙을 따라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정한 속도로 조깅을 하는, 흔한 공원. 그 평범한 공원 한쪽 벤치에서, 나는 마누와 함께 마주앉았다. 달라붙는 모기들을 손으로 쫓던 나는 조심스럽게 마누를 여기로 불러 낸 이유를 꺼냈다.
“나 요가도 궁금한데.”
“너의 세계도 궁금해 마누야.”
몇 번의 통화로 내가 깨달은 사실은 요가 그 자체보다도 요가를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와, 그 세계를 살아가는 마누의 방식이 더 궁금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세계를 곁에서 지켜본다면 나 역시 그런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저돌적인 고백에 그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꽤 오랫동안 침묵을 이어갔다. 그... 음....침 마르니까 거절할꺼면 좀 빨리 말해줄래. 한시간 같은 10분이 흐르고 난 뒤, 마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 전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어.”
그래. 그럴 수 있지.
여기까지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이 문제였다.
“그리고 누나는…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 같아.”
가르쳐야 할 사람?
“응. 제자.”
이게 지금 무슨 신박한 거절법일까. 네이트 판에서도 이런 거절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런 전개는 무슨 카테고리에 올려야 하나. 딥하게는 아니어도 아주 조금의 로맨스 정도는 기대하고 왔건만 갑자기 청소년 성장물로 전환된 이 느낌.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채 입을 벌리고 다음 말들을 기다렸다. 그는 놀란 나를 진정시키듯 단호하게- 그리고 정말 그 어느때보다 진지하게 설명을 덧붙여나갔다.
“수련하다 보면 혼내야 할 상황도 생길 거야.
그런데 우리가 사귀게 되면 내가 객관성을 잃을 수 있어. 그건 우리 관계에 좋지 않아.”
수련? 네가 나에게 혼을 낸다고...? 아니 잠깐만. 그럼 여태까지 나눴던 그 많은 통화들이 정말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단거야? 오로지 선생님의 위치에서 내 모든 질문에 응답한거라고??
'끄덕끄덕.'
.
.
.
조금의 틈도 없는 이 상황을, 나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가르쳐야겠단 확신은 그의 직관에서 나왔으므로. 더 이상의 논리는 무의미했다. 거절을 들은 나는 마음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침착하게 다시 되물었다.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우리가 함께 했을 때의 긍정적인 미래 버젼을 발표해보았지만, 그는 모든 예상에 부정적인 답을 내렸다.
근데 ... 또 너무 설명을 잘하니까, 이상하게 나까지 설득되는 허거덩스한 상황. 이게 고백을 거절하는 자리인지, 아니면 논문 발표 현장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근거 제시, 사례 비교, 향후 전망까지. 완벽했다. 기승전결이 이렇게 탄탄한 거절은 처음이었다.
아주 그냥 판사해도 되겄어 이 양반아~!
무엇보다, 내가 조금 더 밀어붙이면 흔들릴 것 같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꼬시면 넘어올 여지? 그런 건 애초에 설계도에 없던 구조물 같았다.
단단했다. 쓸데없이.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판결에 금세 안심해버렸다.
아, 이 사람은 지금 진짜로
나를 생각해서 거절한거구나.
애매하게 여지 주는 타입이 아니구나.
그날 밤 나는 그의 직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의 장황한 설명 덕분에 이 관계가 오늘로서 완전한 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이어나갈 수는 있었다. 형태만 달라질 뿐. 그리고 내가 원했던 형태가 아닐 뿐. 제자로라도 너의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얼떨결에 마누의 '공식 제자'가 되버린 나.
고백했다가 관계가 정리 되버렸네. 시간이 지나면 나도 너처럼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너의 생각은 어때 마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