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잊은 명상가들

요가는 왜 몸에서 시작하는가

by Lazy Yoga Club

얼마 전, 베단타 철학을 가르치는 아쉬람에서 인연이 된 분들과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분들은 ‘몸과 마음이 있는 이 세계는 모두 허상’이라는 베단타 철학에 따라, 가만히 앉은 채로 고요한 명상 수련만을 추구하고 경전에 있는 구절들을 깊게 공부하는 것. 혹은 구루에게 봉사하는 행위로써 수행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쉬람이 생기기 이전부터 십몇년을 스승님과 함께 공부하신 분도 계시고, 다섯 손가락을 넘길 만큼 오래 다녔다는 분도 계셨으나 그곳에서 만난 분들의 대다수는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더 강했다. ​


‘명상 좀 하셨다는 분들인데… 느낌이 왜 이렇게 복잡스럽지?’


천천히 생각해 보고 물어보고 살펴보던 나는 이분들과 나눴던 대화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바로 몸으로 하는 요가(아사나)를 달갑지 않게 본다는 점. ​아사나를 단 한 번도 해보지 않고 명상으로도 충분하다는 사람들에게 편견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번 만남으로 나의 편견이 더 확고해져 버렸네. 그분들이 명상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명상을 얼마나 제대로 수련하고 있는지 자세히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내가 아는 명상과도 분명 차이점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몸의 정화가 명상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있고, 꼭 요가를 해야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몸의 통증이나 감각에 끌려가면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하는 명상’만을 고집하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앉아서 명상하기 이전에,

몸을 정화하는 건 왜 중요할까?

이다와 핑갈라와 나디를 덧붙여 작성해 본다.


나디 (Nadi)

나디는 쁘라나 (기)가 흘러가는 신체 내 신경 통로다. 나디의 어원인 nad는 진동, 움직임 혹은 흐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 몸속에는 72,000여 개의 나디가 있다고 하는데, 모든 나디는 차크라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다와 핑갈라, 그리고 수슘나 나디에 의해 통제된다고 한다. 나디의 원활한 흐름은 심신의 건강함을 의미한다.


이다 나디 (Ida Nadi)

이다 나디는 정신적 에너지의 신경 통로이며, 사고와 창조성, 알아차림과 관조의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척추 중앙부의 수슘나를 중심으로 베베 꼬여있는데, 맨 아래 차크라인 물라다라 차크라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감고 돌아서 다음 차크라에 도달하고, 또다시 위로 갈 때는 오른쪽으로, 그 위는 왼쪽으로 돌면서 상위 차크라인 아즈나 차크라까지 올라간다.

핑갈라 나디 (Pingala Nadi)


핑갈라 나디는 생명력이 흐르는 통로로서 신체적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뜨거움과 외향성, 적극성, 역동성을 나타낸다. 핑갈라는 이다 나디의 반대 방향으로 수슘나를 감고 위로 올라간다.


수슘나 나디 (Sushumna Nadi)

수슘나 나디는 척추 내부의 비어 있는 공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다와 핑갈라가 균형을 이루고 만나는 지점이다. 중추 신경에 해당하고, 맨 아래쪽에 꾼달리니, 혹은 영적 의식으로의 에너지가 수직으로 상승해서 사하스라라 차크라 (맨 위쪽 정수리 차크라)까지 올라가는 프라나(기) 움직임의 통로이다.


엑스레이에도 CT와 MRI를 찍어봐도 수슘나 나디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에너지체인 몸으로 보자면 에너지 통로는 마치 신경계처럼 전체적으로 퍼져있고, 또 차크라의 형태로 모여있다. 에너지는 쁘라나 즉 숨을 의미하고 숨 쉬는 통로를 정화할수록 명상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꾼달리니.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요가자세, 아사나는 명상 상태에 더 오래 머물고 앉아있을 수 있도록 설계되고 만들어졌다. 몸의 근육, 신경, 기관들이 규칙적으로 제 할 일을 하면서 질병과 고통에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서야 마음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을 정화하지 않고서 명상에 머무는 상태와 몸을 정화하고서 명상에 머무는 상태는 분명히 다르다. 한 번 해보면 진짜! 둔한 사람도 느낄 만큼 다름.


덧붙여 ’ 요가‘라는 단어는 결합, 또는 합일. 하나가 되다.라는 의미의 Yuj (유즈)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여기서의 결합은 몸과 마음과 영혼. 혹은 외면과 내면의 의식을 뜻한다. 즉 요가는 육체와 정신을 결합시켜 하나로 만드는 행법이다. ​명상만을 추구하는 분들이 간과하는 지점은 요가가 거친 육체적 몸에서부터 미묘한 정신과 감정의 단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몸'의 위치를 수준이 낮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상은 '정신'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이 분들의 오류이다.

몸 마음 영혼. 이 세 개는 상하관계도 아닐뿐더러 한쪽이 더 뛰어나거나 모자라는 등의 등수매김 없이, 모두 이어져있다. 거친 곳에서 미묘한 곳으로 단계가 있을지언정 그렇게 단계별로 정화했을 때 더 쉬워진다는 뜻이지 몸의 정화 = 낮은 수준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것.


세 개의 결합이 가능해지는 지점은 몸과 마음과 영혼에 어느 하나 치우쳐지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찾아내며 서로가 이어지는 통로에 불순물을 제거해야만 이를 수 있다. ​높은 단계부터 한답시고 마음만 정화해 봐야 (몸에 감각이 가득한데 정말 마음을 바라보며 정화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한쪽으로 치우쳐있으니 결합이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다와 핑갈라, 그리고 수슘나 나디 통로마다 있는 차크라들이 활성화되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스탭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서 배우는 철학의 내용이 '몸'과 '마음'을 버리라고 말하는 철학이기는 해서 왜 그런지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닌데. 몸을 확실히 버릴 수도 없고, 마음은 감각에 휩쓸리고 다닌다면 철학의 내용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이미 몸이라는 물질세계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면 그걸 잘 관리해 주는 게 현실에 더 맞지 않냐 이거지.

철학대로 살든가. 진짜 버리든가~

나는 뭣땜에 이렇게 답답해하냐.....

그건 아마 내가 몸으로도 요가를 하고 있는데

날 낮은 수준의 수련을 하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져서 일 것. 하하하…

저는 쉬운 길로 가겠습니다 선생님들.

많은 가르침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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