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초에 미국에 왔는데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정작 제대로 된 풀타임 직장을 가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8년이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절묘한 타이밍으로 미국 존슨 앤 존슨에 입사하면서 직장생활의 제2막을 시작하였다. 기쁨과 즐거운 기대감도 잠시, 첫 3-6개월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고,심리적으로도 수없이 무너지고 깨지던 나날들이었다. 우선 나는 내가 맡은 분야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존슨 앤 존슨은 타이레놀로 대표되는 제약 부분 및 로션, 리스테린 등을 만드는 소비자 관련 제품들로 유명하다. 내가 속한 사업부는 생소한 의료 기기 사업부였다. 의료기기 사업부는 서로 다른 의료용품들을 파는 대략 7개 브랜드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 브랜드들은 각기 전담 재무회계 부서 또는 규모가 작은 사업부일 경우 3-5명의 파이낸스 인력이 여러 브랜드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나는 당시 의료기기 사업부 매출 순위 2위에 해당하는 브랜드에서 테크니컬 서비스 원가/비용 분석을 담당하는 시니어 애널리스트로 채용되었다 (2020년 7월 현재 이 브랜드 사업부는 타 회사로 인수되어 모기업의 산하가 아닌 브랜드 네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추후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내가 채용되기 전에 업무를 맡아했던 애널리스트는 회사의 직무 로테이션 프로그램에 속해 있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중요한 월별/분기별 마감업무만 빠르게 인수인계를 해준 후 다음 근무지인 뉴저지로 떠났다.
의료 산업 관련 경험도 없고, 금융권에서 일하다 미국에 오긴 했지만 기업 재무회계 쪽에서 일한 경험도 전무했고 거기에 일찍 미국에 온 유학생도 아니고 서른 넘어와서 언어적 장벽까지 겹치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회의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회의 때마다 적게는 3-5 명 많게는 10명 이상의 이 분야 경력만 십수년 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정말 멘탈붕괴 경험은 수도 없이 한 것 같다. 그들이 내가 아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해도 완벽히 이해할까 말까인데 내가 전혀 모르는 의료기기 분야에 대해서 이미 진행해오던 이슈에 관한 회의를 하고 있으니 나는 정말 회의가 끝날 때마다 진이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버틸 수 있게 힘이 돼 준 것은 지금까지 만난 상사들 중 손에 뽑을 만큼 존경스러운 나의 매니저와, 또 함께 일하는 동료, 또 동료들이었다. 내가 존슨 앤 존슨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전혀 텃새 없이 새로이 입사한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실제로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 질문에 답을 해주고 같이 고민해주었다. 여기에는 약간 조직의 특수성도 기인하는데 그들의 신입 채용인력의 대부분은 2년간 다양한 파이낸스 업무를 경험하는 FLDP라 불리는 직무 로테이션 프로그램을 통해서였고, 매니저나 임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소수가 나와 같은 경력직 채용이었다. 때문에 많은 수의 파이낸스 팀 인원이 1~2년 있으면 업무가 바뀌어 다시 적응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관리자급 역시 새로운 사업분야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으로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내 고충을 100% 이해했다고 볼 순 없지만, 그들도 항상 처음이 있었고, 적응기간이 있었고, 너무 쉬운 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던 시기를 미리 거쳐왔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항상 팀원을 서포트하는, 초보적인 질문도 어리석게 치부하지 않는 문화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와 그 문화를 잘 실천하는 친절한 동료들 덕분에 나는 '팀의 민폐덩어리 같다'라는 마음의 부담을 지우고 점차 적응해나가고 또 일부가 되어갔다.
인수인계 중에 했던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바보 같은 질문이 생각이 난다. 나를 인수인계해주던 D와, 매니저 E와 내가 셋이서 월별 비즈니스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비용 이슈를 두고 매니저 E는 Good guy 또는 Bad guy 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내가 한 질문은 이랬다.
"E, 질문이 있는데 혹시 굿 가이, 베드 가이가 유지보수 엔지니어의 성과가 좋고 나쁘고를 의미하는 건가요?"
내가 맡은 테크니컬 서비스 부서는 대략 10명의 오피스 인력과 100명 이상의 필드 서비스 인력을 보유한 꽤 큰 부서로 나는 그 부서의 모든 운영비용과 의료 기기 보수 유지 시 들어가는 부품 및 인건비용 관리를 맡았기 때문에 나는 그 의미가 성과가 좋거나 나쁜 서비스 엔지니어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했다.
매니저 E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손익 (테크니컬 서비스 부서의 손익) 관점에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좋은 이슈면 Good guy, 비용을 늘리는 이슈면 Bad guy라고 불러요."
지금에야 나도 회의시간에 굿 가이, 베드 가이 또는 우호적 (favorable) , 비우호적 (unfavorable) 등 다양한 말로 표현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 그 이후에도 나는 무궁무진한 비슷한 류의 질문을 이어나간 것 같다.
만약 누군가 어떻게 저것도 몰라 라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면 또는 내 질문이 대답하기 가치 없는 질문으로 치부되었다면 나는 아마 더 이상 질문하기를 멈췄을 것이다. 이 세상에 바보 같은 질문이나 어리석은 아이디어는 없다. 집에서 남는 매트리스를 거실에 두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빌려주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어리석은 아이디어로 치부했다면 에어비앤비 (AirBnB)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처음을 망각하여, 새로운 입사한 사람이 너무 바쁜데 기본적인 질문을 할 때 또는 알려준 것을 2번 3번 다시 질문할 때 가끔 귀찮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의 처음을 떠올리며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한다. 더욱이 최근 채용된 사람들은 재택근무로 모든 인수인계와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니 더 힘들 것이다.
칩 히스와 댄 히스가 저술한 책 [순간의 힘]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 중장비 농기계 제조업체 존디어(John Deere)는 아시아 지사의 직원 몰입도와 근속률을 높이기 위해 "First Day Experience ( 출근 첫날 경험)" 프로그램을 고안했다고 한다. 당신이 첫날 회사 로비에 도착하면 로비에 설치된 화면에 "우리 회사에 온 것을 환영 합니다 XX 씨"라는 문구가 뜬다. 배정된 자리에 도착하면 작은 농기계 모형의 선물이 있고, 컴퓨터를 켜면 하단에는 "앞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란 문구가 적혀있다. 이메일에는 "앞으로 존 디어에서 오랫동안 성공적이고 보람 있는 회사생활을 하기 바란다."는 회사의 CEO가 메시지가 도착해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당신의 자리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환영 인사를 건넨다.
누구나 처음이 있고, 팀원들이 누군가의 처음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그 회사의 문화가 결정된다는 것을 나는 미국에서 첫 사회생활을 하며 배웠다. 존디어처럼 정교하게 디자인된 프로그램이 없어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팀원들만으로도, 또 내가 그런 팀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