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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지살롱 Nov 08. 2023

자기만의 조명 온도

집마다 저마다의 온도를 가지고 있다


호주 시드니에 Manly라는 바닷가 마을에 살았던 적이 있다. 작은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는 1,2층 높이의 하우스가 대부분이었던 그곳은 저녁이 되면 가까이에 있는 집부터 멀리 보이는 건물까지 모두 노란빛으로 가득해 밤의 분위기가 좋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카페에서 일했는데 카페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집마다 창밖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방인으로 호주에 있던 나는 따뜻해 보이는 집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무척 궁금해 불이 켜있는 집을 지날 때면 창문 유리창안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따뜻해 보이는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화목해 보이고 여유 있게 느껴졌다. 호주에서 내가 살던 집도 정원이 있는 2층 집에 고양이 3마리와 뉴질랜드 출신 아줌마, 워킹홀리데이 온 영국 여자아이와 꽤 가족처럼 잘 지내고 있었지만 외국에서 지내며 느끼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노란 조명 아래 집들이 유난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국에 돌아와 혼자 살게 된 후부터 나의 공간은 무조건 노란 전구색으로 바꿔 살고 있다. 호주에서 노란 조명이 그리웠기도 했고, 외국에서는 형광등은 실험실에서나 쓰는 불빛이라는 소리를 듣고부터는 그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 집은 실험실이 아니고 내가 사는 공간은 그렇게 구석구석까지 밝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흰색 조명은 멋이 없고 차가운 느낌이 들어 집안 조명을 모두 따뜻한 전구색으로 바꾸고 나면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만 같았다. 나의 노란 조명에 매우 만족했다. 하지만 모두가 노란 조명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 우리 집을 방문하는 친구들에 따라 취향의 온도차를 느끼기도 했다. 노란 불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어두워서 졸음이 온다는 친구도 몇 있었다. 그중 한 친구는 유난히 형광등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집안 조명은 밝아야 한다며 노란 조명아래는 시야가 답답하게 느껴져서 본인집은 형광등이 아닌 곳이 없다고 했다. 그때 처음 은은한 노란 조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처음 호주에서 노란 불빛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2년 사는 동안 적응이 되어버렸는지 지금은 형광등 불빛에서는 너무 밝은 느낌이 들어 조금 긴장감이 든다.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퇴근 후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면 내가 사는 아파트도 베란다로 비치는 집안 조명을 보곤 했다. 우리 동으로 올라가는 길이 평상형 아파트의 베란다 전면이 항상 보이기에 여느 때처럼 걸어 올라가는데 어느 날 비슷하게 느꼈던 조명 색이 집집마다 다른 색을 갖고 있는 걸 발견했다. 우리나라는 예전엔 대부분이 하얀 형광등에 가까웠지만 요즘은 주황 불빛도 많이 보인다. 그런데 주황색, 흰색조명으로만 생각했던 조명이 색이 조금씩 달랐다. 아파트 연차가 쌓이면서 들고나가는 집들이 많아지고, 리모델링한 집이 많아지며 조명색이 다채 로워 진 것이다. 하얀색, 파란 하얀색, 보라색에 가까운 하얀색, 노란 주황색, 좀 더 진한 주황색, 초록색에 가까운 하얀색 등 조금씩 빛의 온도 차에 따라 집 밖으로 보이는 색들은 다양했다. 빨간색 조명을 보며 '파티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보라색에 가까운 조명을 보며 정육점이 생각났다. 초록색에 가까운 조명은 뭘까를 고민해 봤다가 내가 좋아하는 은은한 노란 조명을 발견하면 천장부터 벽이 모두 하얗고 차르르 커튼까지 치고 있어 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 된 집이라는 걸 짐작했다. 


현재 살고 있는 우리 집은 이사 올 때 전체 리모델링을 하고 들어왔는데, 인테리어 실장님과 조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린 노란빛을 좋아하니 집안 모든 조명을 간접조명과 노란빛으로 요청드렸다. 실장님은 다른 곳은 다 공감하셨지만 공부하고 책 읽어야 하는 아이방과 서재의 조명은 밝아야 한다고 했다. 책을 읽을 때는 어느 정도 밝기가 보장되지 않으면 눈에 안 좋다고 노란빛 중에서도 제일 밝은 빛으로 해주셨다. 인테리어가 끝나고 살다 보니 거실 조명은 조금 어둡게 느껴진다. 저녁에는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거실에서 책을 읽는데 기존 조명으로는 눈에 침침함을 느껴 보조조명을 더 쓰고 있다. 내가 왜 이렇게 노란 조명에 집착하는가 생각해 보니 내가 호주에서 느끼고 싶었던 그 따뜻함을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집의 온도는 노란빛의 온도만큼 포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내가 호주에서 창밖으로 부럽게 쳐다보던 그 불빛처럼 우리 집에서도 노란 조명으로 따뜻한 온기를 품길 바라는 마음이다. 


각자의 개성처럼 집들은 저마다의 온도를 갖고 있다. 우리 집은 우리 집만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온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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