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 여행자 Jan 14. 2020

청소하는 마음

어쩐지 마음이 붕 떠있을 때, 정신이 산만해 무언가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 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대로 누워 유튜브의 끝없는 알고리즘 속을 헤매거나 벌떡 일어나 청소를 시작하는 것. 대개는 유튜브에 복하지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다행히 청소 얘기다. 내 청소는 밖으로 나와 있는 물건을 제 자리로 집어넣는 것부터 시작된다. 우리 집에 얼마 없는 가구는 대 수납용인데도 가구 위엔 늘 몇 가지 물건이 늘어서 있다. 보다 만 책이나 안경, 옷이나 화장품 같은 것들. 물건을 제자리에 하나씩 집어넣은 뒤엔 막대걸레나 물티슈 통을 집어든다. 집이 작아서 청소기를 자주 돌릴 필요가 없다. 막대걸레로 넓은 면적을 쉭쉭 밀어준 후 물티슈 통을 들고 다니며 작은 방 구석 구석,  소복이 앉은 먼지를 닦아낸다.     

 

어느덧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면 내친김에 욕실로 향한다. 수세미에 거품을 묻혀 세면대며 욕조를 문지르고 모가 나달해진 칫솔로 물방울 자국이 선명한 수전 틈까지 양치하듯 닦아낸다. 일회용 플라스틱 포크로 하수구의 머리카락 뭉치도 걷어낸다. 이쯤 되면 나 좀 봐달라며 산만하게 나대던 마음은 이내 노동의 치열함에 꼬리를 내리고 잠잠해진다. 노동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한 집안일이지만.

 

취미가 청소라거나 청소할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청소 후 깨끗해진 집이 기분 좋기 때문이겠지만 내게 청소는 대체로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 중에 발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유능함이다. 내 몸을 움직여 내가 사는 공간을 그저 내 방식대로 쓸고 닦는 동안만큼은 내가 생활의 주인이 된다.     

 

한동안 내게 청소는 그다지 열심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꽤 부지런한 주부였다. 집을 늘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만족하는 성격이라 우리 집은 늘 깔끔했고 물건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부지런함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딸만 둘을 키운 엄마는 딸들의 머리카락이 길어지면서부터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대하여 강박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곤 했다. “이건 길고 노라니까 네 언니의 머리카락이야” “바스락거리는 걸 보니 네 아빠의 머리카락이군.” 바닥에 머리카락이 한 올만 떨어져 있어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꼭 범인을 지목하며 치웠다. 일부러 머리칼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이상 몇 올의 머리카락은 불가항력으로 보였지만 엄마는 머리카락 스트레스를 내려놓지 못했다. 나는 이런 엄마 덕에 청소에 대해서는 적당히 무심한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교훈을 얻으며 자라났다.        


어느덧 나는 온 신경을 머리카락에 집중하던 그 시절 엄마의 나이가 되었고 지금 나는 그 옛날 엄마의 청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엄마의 열정적인 청소가 그저 청소 강박증 탓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돌아보니 엄마는 에너지가 몹시 큰 사람이었다. 쉬는 날엔 혼자 조용히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아빠에 비해 엄마는 자식들이 크고 난 후 집에만 있는 날이 거의 없다. 기질적으론 아빠보다 엄마가 바깥 활동에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어릴 때 시집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전 육아를 시작한 엄마에겐 어울리는 삶을 살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어릴 때 장가들어 일찍이 가장이 된 아빠도 마찬가지지만.

엄마에게 청소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집중해서 발휘할 돌파구였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을 거의 드러낸 적 없는 엄마에게 청소는 심란함을 잊게 해주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음 여린 아빠가 험한 바깥일을 맡을 동안 활동적인 엄마는 집안에 남아 매일의 부지런한 집안일로 아빠의 노고에 화답하고 자신을 다스렸다.          


오늘날 내 삶을 지탱하는 한 축이 밥벌이라면 또 다른 중요한 축은 매일 반복하는 자질구레한 집안일이다. 오래전 아빠와 엄마가 맡아준 그 일을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 한다. 엄마가 청소하는 마음, 아빠가 돈 버는 마음을 몰랐을 땐 두 일의 가치를 멋대로 재단하고 둘 다 어느 정도 폄훼했다. 아빠는 밖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왔지만 집 안에선 대체로 무능한, 그 시대 흔한 가장이었고 엄마의 청소는 유난스러워 보였다.


20대 중반부터 일을 시작한 나는 아빠의 돈 버는 마음을 일찌감치 짐작했지만 엄마가 청소하는 마음은 늦게 깨달았다. 청소란 이런 것이다. 오늘의 밥그릇을 닦고 오늘의 속옷을 빨고 오늘의 먼지를 닦아 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 하루를 지탱하는 엄연한 기둥이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최소한의 품위 있는 삶은 불가능하다. 내 몫의 청소를 외면한 채 바깥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던 날엔 보지 못한 진실이다.


다행히도 둘 이상이 함께 산다면 반드시 집 전체를 담당하지 않더라도 내 작은 공간만큼은 내가 해결하고 사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가 왔다. 전기밥솥조차 다루지 못하는 아빠들은 더 이상 집에서 기를 펴기 힘들고 매일하는 그 청소에 대해서도 이렇게 긴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엉겁결에 대청소를 끝낸 내 작은 집을 쓱 둘러본다. 더 이상 심란함은 없다. 나의 조그마한 유능함과 성실함이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키오스크 앞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