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일찍 겪었으면 괜찮았을까? (놉)
자취 경험이 전무한 나는 갑을 관계를 강렬하게 경험한 적이 없다. Q와 Y도 자취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회사원이 되어 계약서의 을이 되었다고 한들, 서로 필요한 것을 취하는 관계에 가까우니 크게 체감할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입자인 우리는 철저한 을이었다.
화장실 이용 시간, 가스 사용, 권리금, 하나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태산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자리에 나는 다른 일정으로 빠지게 되고, Y와 Q가 집주인님을 대면하게 되었다.
이날 가장 중요한 쟁점은 권리금에 대한 것이었다. 인테리어에 꽤나 큰 비용이 들어가게 될 것이고 잘 꾸며놓고 부수고 나가기도 아깝다. 만약 우리가 가게를 접고 다른 세입자를 찾게 된다면 권리금을 받는 게 서로 가장 아름다운 결론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법적으로도 그 부분은 세입자의 권리로 보장되는 사항이다.
하지만 집주인느님은 끝까지 권리금을 받지 않겠다는 특약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그게 법적 효력이 없어도,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적으라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권리금 때문에 이다음 세입자가 들어올 때 늦어지는 것을 걱정한 것 같았다. Y와 Q가 여러모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이미 집주인의 머릿속에 새겨진 ‘권리금 없음 특약'은 제외하기 어려웠다. 법적 효력이 있든 없든 써달라고 하니, 뭐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열심히 하려는 마음으로 임해야지 벌써 권리금을 받아서 돈 벌 생각을 하는 게 맞냐는 말이 덧붙여졌다. 웬만해선 기분 상하는 티를 내지 않는 Y의 표정이 이때부터 좋지 않았다고 Q가 나중에 말했다. 본인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일단 하기로 결정했으니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화가 마무리될 쯤에 집주인이 뭔가 머쓱했던지, 자기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맞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했다.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의 을로 계약한다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하는 것임을 경험했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표정관리에 대해서는 3명 중에 제일 어설픈 게 나였으니 말이다.
애써 이해해 보자면 그렇다. 손주까지 보신 집주인의 입장에선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젊음! 패기! 새파랗게 어린것들이 뭐 벌써 안될 것 생각하고 머리를 굴리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 인간이란 자신이 바라보는 방식 외에는 넘겨짚는 습성이 있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강해지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그나마 좋은 점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우리가 기대도 않던 화장실 인테리어 비용 분담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차분하게 대화가 가능한 게 어디인가. 애써 긍정회로를 돌렸다.
유쾌하지 않은 대화를 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인 곳이었다. 우리는 가계약금을 지불했다. 작은 짜증과 서러움 따위는 아주 작은, 먼지만도 못한 일이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앞으로 어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질지 모르니 이 정도는 흘려보내자 했다.
마지막으로 Y는 부동산일을 하시는 친구 어머니에게 계약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런저런 조언을 듣고 얼마 뒤, 친구 어머니에게서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우리에게 공유했다.
‘대박 나길.. 위험한 일들도 많을 텐데.. 하다 아니다 싶으면 빨리 접으렴..’
‘밖에서 보는 거랑 너무 많이 달라서 상처 많이 받아..’
‘건강이 최우선…’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 담긴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다. 아니다 싶으면 빨리 접어버리자. 근성 버티기 그런 거 여긴 없다. 그러자.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