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의 숲에 들어간 이유

이 나라에서의 경력단절

by 레이지제스트


인생을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계획은커녕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박스 안 탱탱볼 같이 튀어 다녔다.


스포츠 마케팅이라는 큰 틀의 방향성을 잡고 일을 운 좋게 시작했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외국계마케팅대행사 지사에서 문체부 출연 비영리재단법인에서 국내마케팅대행사.

사람을 피해 환경을 바꿨지만 더한 사람을 만났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시들해져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력단절 기간에 출산과 육아를 시작했다.

일에 욕심이 없다고 스스로 진단했었는데 큰 오진이었다.


나가고 싶었다.

돈 벌고 싶었다.

자존심인지 자존감인지 그 무언가가 높은 나로서는 불균형한 육아 체계가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나도 일을 다시 해야겠다는 목표로 가리지 않고 재취업을 시도하던 중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이전 회사에 다른 부서 부사장님한테서 다시 올 생각이 있냐고 연락이 왔다.


이건 또 무슨 인연이람...


이전 근무할 때 사람들과 맞지 않았지만 일은 잘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얄밉다고.


윗사람이 퇴근 안 하고 뭉개고 있으면 같이 뭉개지 않고, 할 일 해놓고 퇴근한다는데 왜!

예정에 없던 회식을 빙자한 술자리에는 참석 거부한 게 왜!

공식적으로 미리 정한 회식과 워크숍을 가기 싫어도 갔는데 왜! 뭐가 그리 못마땅한 건지.

그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부서에서 나를 다시 찾다니.

기존 팀에 어울리지 못했던 나에 대해 다 알 텐데... 그런 나라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출산까지 해서 육아로 더 오래 일하지 못하는 것도 알 텐데.

그럼에도 오라고 했다.

같은 회사 다른 근무 분위기라.


기존 팀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것까지 커버해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배려해 준다고??!!


다시 기존 경력을 이어갈 수 있으니 불편함은 감수해야겠다 싶었다.

예상대로 기존 팀 국장과 부사장의 무시 아닌 무시와 원망을 받았지만.


이전 선수 매니지먼트, 이벤트 운영과 다른 스폰서십 제안과 마케팅 대행 업무를 수행하면서 현장 업무가 줄어 육아를 병행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여러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육아와 병행하면서 또 한 번의 임신과 출산까지 했다.

아이 하나와 둘은 차이가 있다.

회사 선배들의 경우 아이 하나에 친정부모님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었다.


나 역시 친정부모님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회사 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늘 구멍을 찾아 기어들어가고 싶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둘째까지... 아이 둘을 봐달라고 하면서 회사 생활에 충실하기 정말 어려웠다.


야근이 필요할 땐 일거리를 집에 싸들고 가야 했고, 집에선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데 들고 온 일도 해야 했으니 내가 소멸하는 건가 싶었다.

어쩌다 나가야 하는 출장도 선뜻 가지 못했다. 같은 팀원의 배려도 나중엔 짐이었다.

마음에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동안 일도 일상도 가라앉았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회사에서도 눈치보고, 부모님에게도 죄송하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해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왜 내가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건지.

나 하나만 회사 그만두면 눈치 볼 회사도 없고, 부모님께 죄송함도 덜고, 아이들에게도 집중할 수 있으니 미안해하지 않고 떳떳해질 것만 같았다.


배려해 주던 상사도 한계가 왔는지 외국계회사에 가는 게 어떠냐고 이직 권고를 했다.

드디어 끝이 온 건가.

아님 이직을 알아보던 게 들킨 건가?


최장기간 근무 후 또다시 이직


중간에 출산과 육아휴직 기간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공식적인 근무기간은 제일 길었다.

그래봤자 3년 정도이지만.


일은 계속하고 싶었다.

승진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가늘고 길~게 가고 싶었으니까.

자존감은 유지하고 싶었고, 일을 해야만 가능할 것 같았다.

내 상황에서 감당할 수 있는 업무를 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았다.

그러던 중 찾은 스포츠브랜드업체에서 출연한 기업사회공헌재단.


기획과 관리 업무니까 잦은 지방 출장의 부담은 없을 것 같았다.

대행사 업무가 아닌 일을 해보고 싶었던 바람에도 맞았다.


공고 올린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직을 했다.

흔하지 않은 형태의 취업 공고와 인연이 많은 편인가 보다.


기존 직장 사람들과도 아름답게(?) 이별해서 스포츠마케팅 대행 커리어를 잘 마무리한 것이라 자평했다.

새로운 성격의 일을 혼자 책임지고 하는 것에 에너지가 솟구쳤다.

그러나 역시나 사람이 어려웠다.

특히나 높은 자리를 이용해 해드시는 꼴을 보기 어려웠다.


역시 나는 사회적 인간이 아닌 건가.

'일'만 하고 싶지 사람들과 엮여서 하는 건 정말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다가 번아웃이 왔다.

또다시 시들어가고 있었다.

몸에 이상증상이 나타나면서 나를 먼저 살려야 했다.

직원 충원을 요청했지만 채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축근무 등을 제안받았지만 열정은 메말라 마음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던졌다.

사표를.

그랬더니 후임을 2명 뽑네?

이런...


그렇게 마지막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를 핑계로,

사실은 사람들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도망가는 거였고,

당당하게 일하면서 아이들도 챙길 수 있는 제2의 커리어를 준비해야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세운 퇴사였다.



결국 경력단절의 숲에 들어갔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았고,

버텨도 몇 년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40대를 시작하면서 남들보다 더 일찍 준비하자는 합리화를 한 덕인지 탓인지...

경력단절 숲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당하게.

그러나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립의 과정에 시행착오가 길어지면서

나의 자존감은 말 그대로 쪼그라들다 못해 바사삭 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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