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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Oct 27. 2020

2. 인간 불신, "너만 친구로 여긴 거네."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2. 인간 불신, "너만 친구로 여긴 거네."

 대학은 여러 군데 합격했다. 크게 기쁘진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썩 좋은 간판도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학과 자체는 가고 싶었던 분야인지라 그럭저럭 만족하고 넘어갔다. 엄마는 모 전문대학교 간호학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그쪽을 고집하셨다.


“전문직을 갖는 게 좋은데.”


 의견엔 동의했으나 억지로 무시했다. 내 인성과 좁은 마음으로는 그렇게 베푸는 직업은 영 힘들 것 같았다. 그 길을 걷다 무너지는 날이 오면 후회할 적에 엄마를 탓할 것이 뻔했다. 감사는 못할망정 원망이나 하는 자식이 되고 싶진 않았다. 가뜩이나 잘난 것도 없는데.

 내가 속한 과는 남학생이 다섯, 나머지 열댓 명은 전부 여학생이었다. 이들은 대충 뜻이 맞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녔고, 재수한 나는 한 학번 위 선배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며 제법 잘 지냈다.

 학창 시절 내리 제대로 키우지 못한 사회성이 대학에 왔다고 한 번에 좋아졌을 리는 만무하지만, 나는 기를 쓰고 사교적인 척을 했다. 동아리에도 가입하고 온갖 술자리에 얼굴을 비췄다. 그렇게 하루를 끝내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폭싹 쓰러졌다. 내가 한 말의 어디가 문제가 되진 않았을까, 머리 아프게 내뱉은 말들을 쓸어 모아 곱씹어대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쳤다. 만남이 반복되니 자연스레 마음에 드는 사람도 생겼다. 한 학번 위의 동갑내기 선배였다. 단짝처럼 붙어 다녔더니 주변에서도 저 둘은 언제 사귀느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나는 그 당시 가장 친했던 동기 F양에게 이 건으로 자주 상담했다. 사교적이었던 그는 날 대신해서 선배가 좋아하는 것을 대신 물어봐주거나 식사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대학 생활의 첫 방학이 왔다. 멀리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터라 본가로 돌아간 나는 선배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남자라고는 비난받은 기억밖에 없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두근거리고 요란한 가슴이 부끄러워 내내 부정하기도 했지만, 불붙은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F양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배에게 고백받았어."


 나 나가서 비라도 맞을까? 나는 그 메시지를 수도 없이 다시 읽었다. 고백을 받았다고? 나가서 비라도 맞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선배에게 고백받았으니 넌 당장 병에 걸려 쓰러져라, 같은 소리라도 할 줄 알았나? 나는 반사적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화창 하나 우중충한 빛깔이었다.


“우리 사실 썸 타는 사이였거든.”


 그때서야 비로소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F양은 뒤에서 얼마나 나를 비웃고 있었던 걸까. 우리가 정말 친구 사이였다면 진작에 썸 타고 있었다는 말을 해주었다면 좋았지 않나. 그랬다면 나는 내 패배를 인정하고 깔끔하게 끝냈을 것이다.


"나도 선배랑 사귀고 싶지만 언니한테 미안해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어."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응, 그런데 언니가 선배 좋아하는 거 솔직히 티 많이 났잖아."


 나는 그렇게 엉망으로 까발려진 마음을 채 줍지 못하고 진창으로 차였다. 선배란 놈은 그 동기와 사귈 수 없게 됐다며 나를 '방해꾼'이라고 소문냈다. 그렇게 유난을 떨며 견우와 직녀 행세를 한 주제에 두 사람은 여름방학이 끝나자 연인이 되어 나타났다.




"너만 친구로 여긴 거네."


 우리는 그 누구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난 네가 그놈의 어디가 좋다고 따라다닌 건지 이해가 안 가. 친구 보는 눈도 없지, 왜 그런 애 하고 친하게 지낸 거야?" 그는 내가 낼 화를 대신 내주고 있었다. 날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너는 친구로서도, 여자로서도 정말 아니었다 이거지. 이건 좀 기분 나쁜데? 나의 반박에 우리의 눈알이 허공으로 굴러간다.


"넌 이용당한 거 아닐까?"


 들어봐, F는 얘기 들어주면서 뒤에서 선배랑 썸 탔다며. 그럼 너 하나 막는 건 간단했겠지. 또 선배가 뭘 좋아하는지 대신 물어봐주는 척하면서 밤새 통화했을 테고. …그런데 너, 정말로 걔한테 대신 물어봐달라고 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걔가 먼저 물어봐주겠다고 했어."

"당했네, 당했어."


 걘 너랑 친해질 적에 어떻게 다가왔어? 그냥 어쩌다 보니 친해졌어, 나는 이마를 감싸며 떠듬떠듬 답했다.


"이제 누가 먼저 다가오면 경계부터 해."


 또 이용당할 일 있니?

 


 모두가 수군거렸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 지내니 궁금하긴 했겠지, 몇몇은 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내 평판이 떨어질 것을 무시하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대로 술자리는 최대한 꺼리게 되었고 동아리는 그만뒀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한테 남자 뺏긴 병신”이란 뒷말이 돌았다. 헛웃음이 났다.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였던 나는 F양에게 욕 한 마디 쏴 붙이지 못하고 패배했다. 날 친구로 여겼다면 이런 식으로 상처주진 않았겠지. 어느 날, F양이 술에 잔뜩 취해 “내가 왜 나쁜 년이야?” 하고 물었지만 무시했다. 다음날 곧장 "취해서 실수했다"는 문자가 왔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F양은 내게 미안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극단적으로 학교를 뜰 생각만 했다. 남긴 것이 없으니 미련도 없었다. 편입 준비는 충동적으로 시작했다. 학교 시간표는 최대한 가볍게 짜고 주말은 편입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실컷 바빠지자 마음은 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고, 날 측은하게 여겨 도와주던 다른 동기들 덕분에 학교 생활은 점차 평범해졌다. 그대로 무사히 학교를 빠져나갔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1차 시험에서 3점 차이로 불합격했다.

 스트레스를 풀 틈도 없이 공부를 쑤셔 넣었더니 몸은 망가지고 말았다. 위궤양은 재발했고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병을 진단받았다. 시도 때도 없이 하혈하느라 팔다리엔 힘이 없었고 자궁엔 4.5cm짜리 근종이 생겨 수술 여부에 대한 상담도 반복했다. 호르몬 수치가 들쭉날쭉해져 몸은 자주 부었고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해도 살은 빠지질 않았다. 갱년기인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신경은 날카로워져 갔고 나는 내 분을 삭이느라 어금니만 아득바득 갈았다.



 약을 복용한 지 1주일, 자궁 근종의 크기를 확인하러 산부인과에 갔다. 다행히 약이 들어 크기가 작아졌다며 의사 선생님은 배를 가르지 않아도 되겠다며 웃었다. 섬뜩한 말에 소름이 끼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엔 사람이 가득했다. 두껍게 입은 패딩에 움직임은 굼떴고 히터의 더운 열기로 콧속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버스가 왼쪽으로 커브를 틀자 몸이 앞으로 쏠렸다. 누군가가 어깨에 걸친 내 가방을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라도 된다는 양 확 밀치고 지나갔다.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곧장 옆으로 튕겨 나갔을 정도의 세기였다.


“저게 미쳤나."


 우리는 격앙된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쫓아가서 발이라도 확 밟아?"

“그러다 싸움 나."

"실수인 척하면 돼."


 태연한 표정이 얄미워 입술을 깨물었다. 까슬한 살갗이 이에 걸리자 그대로 쭉 찢어진다. 벗겨진 부위에서 씁쓸한 쇠맛이 났다.


“소리 지르고 싶어.”

“참아”

“넌 화도 안 나?”

“화가 나니까 참고 있잖아."


 나는 우리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대신 화를 내주는 건 그의 장점이지만, 지금의 행동은 날 부추기는 것과 매한가지였으니 덩달아 짜증이 치밀었다.

 

이전 01화 1. 피해망상,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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