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의 첫사랑 항공사 승무원 (승무원 준비편)
이직 이야기에 앞서 나의 첫 직장생활 이야기부터 하고자 한다. 사랑을 시작하면서 이별을 먼저 기대하는 이가 없듯이 나도 그랬으니까. 고등학교 때 나의 꿈은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고2때 인생 진로를 고민하다가 자기 분석을 해 보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 보람을 느끼는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그 고민은 참 유용하고 쓸데 있는 고민이었다. 아주 논리적이고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떠한 장점을 가졌나? 체력 이었다. 운동을 좋아했고, 땀흘리고 뛰고 이러한 것을 좋아했다. 체력이 나름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참 좋았다. 관계에서 오는 행복과 즐거움이 인생에서 큰 의미였다. 이러한 것들을 조합 시키니 '서비스' 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나서 '서비스의 최고봉은 무엇일까?' '승무원'이 떠올랐다. 항공사 승무원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변의 친구들과 진로를 설정하는 나의 방향이 매우 달랐다. 고등학생 때여서 가고 싶은 대학교 및 학과를 선택해야 고민을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진로와 적성을 고민하기 보다는 졸업하고 나면 취업이 잘 될 수 있는 학교 및 학과를 선택했다. 취업의 확률이 높고, 안정적이고,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것들이 일차적인 선택의 기준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꿈을 세웠다. 높은 연봉이나, 안정성 등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나의 적성과 하고 싶은일을 고민하다가 찾은 나의 방향이었다. 현재는 많은 항공사가 존재하지만, 내가 진로를 고민하던 고등학생 때에는 대한항공, 아시아나 두곳만 있었다. 그리고 대한항공은 남자 승무원 공채를 뽑지 않고 한진 그룹 내에서 직장 생활 3년차 이상의 직원들에게 지원을 받아서 남승무원을 뽑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때 당시에는 항공사 남승무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시아나 항고이었다. 통상적으로 상/하 반기 공채를 통해 1년에 남승무원이 6명 정도 선발되었다. 그 확률적으로 낮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주위에 친구들이 진심으로 많은 염려를 했다.
'승무원은 기내에서 단순하게 음료나 기내식을 나누어 주는 직업이 아니냐?'
'확률이 낮은 직업인데, 그러한 목표 설정은 위험한 것 같다.'
'기내에서 일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비행을 오래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고려해 봤느냐?'
'남승무원 일하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떠나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는데, 승무원의 경력을
살려서 무슨일 을 할 수 있느냐? 별로 할일이 없을 것 같다.'
하나 같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꿈이 라는 것은 논리보다는 감성의 영역이다. 확률 이라기 보다는 욕구의 영역이다. 간절함과 가슴 깊이 꽂히는 영역이다.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승무원이 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적기는 하지만 누군가 승무원이 되고 나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떠한 근거 없는 자신감 이 었는지 모르지만, '노력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기내에서 이루어지는 서비스가 단순하고, 자기 계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들은 말했다. 하지만 승무원의 일은 승객들을 다정하게 맞이해 주고, 음료 및 기타 필요를 채워주고, 목적지 까지 안전하게 즐겁게 보내는 일은 매우 즐겁고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염려와 걱저이 많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컸다. 꿈에 대한 강렬함과 간절함이 현실에서 예상되는 여러가지 염려를 초월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승무원의 꿈을 준비하다가 이루지 못하다 하더라도 얻을 게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 2때 부터 승무원의 꿈을 꾸면서 대학교 때 어떤 학과를 갈지 고심을 했다. 1998년 내가 고3 일때는 지금처럼 항공운항학과가 많지 않았다. 승무원 관련 학과는 당시 인하공전이라 불리던 인하공업전문대학에 2년제 밖에 없었고 여자만 입학이 가능했다. 일단은 직접 승무원을 준비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항공대학교를 가야 하나? 내가 승무언이 되고자 했던 가장 큰 목적과 이유는 '최고의 서비스맨'이 되고 싶어서 였다. 항공대학교에 여러 학과가 있었지만 서비스와 관련된 부분은 없어서 패스했다. 관광학과 그리고 호텔경영학과를 고민 했다. 그런데 마음이 확 움직이지는 않았다. 고3 2학기에는 국문학과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책보고 글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때 독후감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탔는데 매우 기뻤다. 하지만 결국 경영학과로 진로를 선택했다. 승무원 채용시 학과 제한이 없다. 어릴 때 명확한 이유는 없지만 승무원의 꿈을 갖기 전 비즈니스맨 들의 모습이 멋있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입고, 바쁘고 열심히 움직이는 모슴이 역동적이었다고 할까? 어릴 적 해두었던 메모가 기억난다. '빈스 클럽'. 세계 가국에 프렌차이즈를 세울 그룹 이름이었다. 건물은 피라미드 형태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서 디자인 했다. 나의 이름 끝자를 따서 '빈스 클럽' 이라 이름지었다. 남자 승무원 준비를 위한 학과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든 여러가지 생각보다 오랫 동안 생각해 왔던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국립대학교로 진학하게 되면 학비도 저렴 하니까 나쁘지 않았다.
대학시절 경영학을 재미있게 공부하면서도 나의 전공은 항공 서비스라는 생각을 했다.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서비스 관련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고객 만족, 감동을 외치던 미국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서비스 일화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한 고개이 백화점에 찾아와 타이어를 환불해 달라는 요청에 백화점은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 이 타이어는 인수한 백화점에서 판매하던 것으로 노드스트롬에서는 팔지 않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노드스트롬 백화점은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 왜? 고객이 원했으니까. 그 사건으로 인해 타이어의 가격은 손해를 봤지만,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서비스 정신은 고객들에게 퍼져 엄청난 명성과 매출을 기록했다. 나도 나중에 항공사 승무원이 된다면 이러한 감동적인 서비스가 가능한 시스템과 마인드를 갖춰야 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대학생활을 여러므로 재미있게 보냈다. 일단 항공사 승무원 이라는 목표가 있어서 미래에 무엇을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단 '어떻게 하면 항공사 승무원이 될 수 있을까?'를 계속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서비스 관련 책들은 대학교 1학년 때 부터 꾸준히 보았다. 그리고 군대를 공군으로 지원했다. 엄밀히 따지면 항공사 승무원과 공군이 직접적인 연관성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닦더라도 항공사 승무원이 되는데 무언가 조금이라도 더욱 가까울 것 같았다. 공군에 합격을 하였고,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비행장에 근무하지는 못했다. 공군에는 '방공포'라는 미사일 부대가 있는데, 주로 산에 위치한다. 그리고 미사일 부대에는 전투기도 없다. 그러나 또 재미난 것은 군 생활을 하면서 부대에 신임 배치된 장교분의 인맥을 통해서 대한항공에서 실제로 남승무원 생활을 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공군에 지원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이루고자 하는 꿈의 목표가 있다 보니, 진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나 또 그러한 이야기를 주위에 많이 하다 보니 그러한 만남도 이루어 졌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휴가때 나가서 현직 남승무원을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단, '이대로 열심히 준비하신다면 그 꿈을 이루실 수 있겠는데요.' 그 말은 또렷히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나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말이 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전역을 하고 처음 시작한 것은 수영장에 등록을 했다. 항공사 승무원 테스트 중 수영 테스트가 있기 때문이었다. 집은 전북 익산이고 학교는 전주에 있어서, 자차로 통학시 약 40여분 정도 걸렸다. 수업도 받아야 하고 수영도 해야 해서, 학교 근처 수영장에 가보니 가능한 시간이 새벽 6시 수업이었다. 망설일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무조건 시작이다. 1학기 중에 4개월을 전주에서 다니고 방학기간에는 익산에서 수영장에 계속 다녔다. 6개월 정도 지나니, 접영 까지 할 수 있게 되어, 승무원 수영 테스트 중 25m를 수영으로 가는 것은 큰 무리 없이 가능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목표하고 배운다면 일정 수준이 오를때까지 배우면 좋다. 한달을 하고 그만두는 것과 6개월을 하고 그만 두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6개월정도 배우고 나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나중에 다시 시작해도 금새 과거 실력이 되살아 나니까.
대학시절 승무원 준비를 하면서 각종 축제에 자원봉사자 활동을 했다. 서비스 및 봉사를 직접경험할 수 도 있고, 다양한 만남 및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엄청 까다롭지는 않지만 인기있는 축제의 경우 경쟁률이 있는 편이어서 서류 와 면접을 통과해야 자원봉사자가 될 수 있다. (자원봉사자를 일전에 줄임말로 '자봉'이라고 했는데, 감회가 새롭다.) 그러한 경험도 좋았다. 그리고 항공사 승무원 자기소개서 작성시, 자원봉사자를 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많이 활용했다. 서류전형에서는 모두 합격이었었는데, 대학시절 다양한 자원봉사자 경험은 매우 감사했고, 참 잘한일이었다.
전북대학교를 나왔는데, 지방 국립대학교 간 국내교환학생 제도가 있었다. 친구들은 국제 교류학생으로 가기도 하는데, 간혹 교환학생으로 간 학교간의 성적 기준이 달라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와서 학점을 위해 반학기를 더 수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외 교환학생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신입사원을 뽑을때 항공사에서도 나이제한이 있었다. 졸업예정자, 그리고 졸업후 1년이 지나면 대기업에 신입사원으로 공개채용에 지원이 어려웠다. 대학생시절, 아직 항공사가 많이 없고, 대한항공 아시아나 두곳만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승무원 공채를 뽑은 것은 아시아나 였고 상반기 3명, 하반기 3명. 이랬다. 산술적인 계산으로 내가 응시할 수 있는 기회는 총 3번. 국제교류학생으로 다녀왔다가, 졸업이 늦어지던지 하면 기회가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너무 좁은 시야였다. 해외교류학생을 다녀왔다면 보다 많은 경험과 시야를 일찍 가졌을 것이고, 국내 항공사 승무원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외항사 승무원으로서도 도전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국내교환학생으로 방향을 선정하고 부산대학교와 경북대학교를 두고 고민했다. 인구규모나 도시의 크기를 생각하면 부산대학교가 좋을 것 같았다. 대구에 위치한 경북대학교는 부산보다는 조금 더 생소한 느낌이 있었다. 대학교 2학년을 보내면서 이제 3학년 때부터 취업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준비를 해야했다. 승무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승무원 학원'을 다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북 지방에서는 마땅한 승무원 학원을 찾지 못했다. 승무원 학원이 있기는 했으나, 여승무원에 해당하는 과정이 거의 대부분 이었다. 서울로 승무원 학원을 주말에 오고 다니기에는 경비문제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 교환학생을 가게 될텐데, 부산과 대구에 있는 승무원 학원들을 검색해 보았다. 그 중 대구에 있는 '에어패스' 라는 승무원 학원은 홈페이지에 남승무원 카테고리가 따로 있었다. 그 당시 승무원 학원 관련하여 많은 검색을 하였지만 '남승무원' 콘텐츠가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다. 그리고 서울의 승무원 학원의 경우 2~3개월 과정으로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수강기간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대구에 있던 승무원 학원의 경우, 한 번 등록을 하면 재수강도 가능했고, 합격할 때까지 케어를 해준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고민 끝.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로 가기로 결정하고, 감사하게 합격했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으로의 출발. 두려움 보다는 설레임이 가득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승무원 학원도 다닐 수가 있고,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도움이 되니까.
승무원 학원의 장점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남승무원 준비생을 만날 수 없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꿈꾸고 소망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가끔 현실을 보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열심히 하지 않는 때가 많다. 승무원 학원 수업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그러한 부분을 계속 점검할 수 있었다. 승무원 학원을 다니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스마일의 중요성이었다. 그날은 승무원 학원에서 특강이 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국내 항공 시장의 미래'가 주제였다. 지금은 대한항공, 아시아나 가 양강을 이루고 있지만 추후에는 저비용항공사(LCC:Low Cost Carrier)가 많아 질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률이 높고, 저비용 항공사 들의 성장세가 가장 가팔랐다. 해외 저비용 항공사들이 국내 시장을 선점하기 이전에 국내에서 대응책도 필요했고, 중장거리 노선에서 해외의 저비용 항공사들의 성공을 보면서 벤치마킹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지금 한국에 있는 항공사들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이러한 미래 전망을 이야기 하면서 한편으로 강사님은 스마일에 대해서 말씀을 주셨다. 본인이 미남은 아니지만 인상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듣는다고. 젊었을때 어디를 다니든 얼굴 근육을 풀고 좋은 인상 미소를 갖기 위해 무더한 노력을 했다고 하였다. 그 날의 핵심 주제는 항공산업의 미래 전망 이었지만 나의 가슴속에 꽂힌 것은 '지하철 속에서도 얼굴 근육을 풀면서 누가 보면 미친 사람처럼 웃고 또 웃었다' 는 강사님의 그 노력과 진정성이었다. 그날 강의 이후 나도 시시 때때로 환한 미소를 갖기로 결심을 했고, 실천을 했다. 심지어 사우나에 들어가서도 뜨거운 증기가 가득한 그 속에서 스마일 연습을 하고 또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우나에서 까지 미소 짓지 않아도 되긴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는 완성되어 있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았을 지라도, 열정과 태도는 넘쳐났으면 했다. 부족한 것들은 계속 채우면 되는 것이고, 자세와 목적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덧 4학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꿈을 정하고 나서 변함없이 한 길만을 준비해 왔다. 그 열망이 얼마나 강했던지, 주위 사람들에게 내꿈은 '승무원이에요' 이야기를 많이 해 놓아서, 항공사에 취업을 못하면 해외로 가야하는게 아닌가 생각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대학교때 나를 알던 사람들이 졸업후 만나게 되면 '승무원이 되었어?' 하고 물어볼텐데 '다른 일을 하고 있어' 라고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 놓고. 그리고 무슨 배짱이었는지,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도 대기업 공채, 공사 공채, 일반 업체 채용에 대해서 폭 넓게 준비를 하지 않았다. 나의 길은 승무원 이라는 확고한 신념하에 오직 항공사에만 서류를 지원하였다. 4학년 2학기 때, 아시아나 항공에 지원하여 서류 합격 1차 면접에서 탈락. 여러명의 지원자가 함께 면접을 보았는데, 별다른 질문을 크게 받지 못했다. 승무원의 지원자격이 대기업처럼 까다롭지는 않았다. 서류상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은. 그러나 내가 한가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시아나 항공은 대기업 계열사 였다는 사실이었다. 토익점수가 높아서, 나쁠 것이 없었다. 물론 최종 합격을 한 남승무원 중에 고득점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하지만 면접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승무원 까페를 통해 면접 후기 등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형식보다는 내용, 번지르르함 보다는 실속, 토익점수는 높은데 영어는 한마디 못하는 것 보다 점수가 낮아도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는 자신감. 난 이런게 더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스펙 까지도 관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라는 아쉬움은 있다. 한성항공(대한민국 최조의 저비용항공사, 현재는 티웨이 항공) 2기 승무원 공채에 지원을 했었고, 최종면접까지 갔으나, 떨어졌다. 남승무원 채용이 완전히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졸업을 했다.
이 시기는 취업을 하기 전 가장 고뇌했던 시기이다. 승무원의 한 길 만을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다른 길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졸업을 했으니 취업을 하긴 해야 했다. 여유롭게 항공사 취업준비만 할 수 없는 상화이었고, 항공사 취업이 당장 힘들면 일단 다른 곳에 취업을 하고 나서 항공사 채용공고가 나면 지원을 해서 꿈을 이루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승무원에 지원 하려면 최소 실무면접, 임원 면접 등 2번은 회사를 빠져야 하는데 신입으로서 가능할까? 이런 걱정도 혼자 하곤 했다. 항공사 승무원을 준비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면접은 제주항공 1기 승무원을 뽑을 때였다. 서류전형 합격, 1차면접합격, 최종 임원 면접만이 남아 있었다. 면접장에 가보니 남승무원 지망자가 4명이 있었다. 1차 실무면접때는 분위기도 좋았고, 답변도 잘했다는 느낌이 이었다. 최종면접에는 3명씩 들어가게 되는데, 남자 지원자 중 한 명은 여자 지원자들과 들어가고 나머지 남자 지원자 3명은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여자 지원자들과 함께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나는 최종 면접 합격을 위해 전략을 세웠는데, 그것은 제주항공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프리젠테이션 파일로 만들었다. 그것을 출력하여 면접장에 들고 갔다. 항공서비스를 사랑하고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열정이 많은 인재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날은 답변이 자연스럽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왠지 긴장이 되는 그런 날. 왜냐면 항공사만 준비하다 보니, 면접이라는 경험이 적었다. 면접의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아야 여러가지 성향의 면접관과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준비가 부족했다. 면접이 진행되면서 기본적인 질문에 잘 답변하지 못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면접관이 이력서의 특기사항을 보더니 '대학교때 아이디어상을 받은게 있네요' 하고 물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주항공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를 준비해 왔는데 잠시 프리젠테이션 하겠습니다' 하고 진행을 했다. 약 20장의 슬라이드에는 항공서비스 아이디어, 마케팅 아이디어 등의 내용이었다. 핛생의 입장에서 아마추어 같은 생각이라도 이러한 것을 준비해 온 나의 열정을 사주지 않겠나? 라는 나름 야심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면접관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3명이서 진행되는 공동 면접의 장소에서 지원자께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혼자 할애 하시면 다른 지원자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겁니다.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너무 나 혼자 생각에 취해 있었다. 차라리 해당 프리젠테이션은 면접을 마치고 마지막 순간에 간결하고 명료하게 '회사 발전을 위한 프리젠테이션을 검토해 주십시요' 하고 전달할 수 도 있었다. 면접관의 입장에서는 지원자 모두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해야 하는데, 1:1 개인 면접이 아닌 상황에서 나만의 무기(?)를 장시간에 걸쳐서 진행한 것은 면접관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면접이 사람을 뽑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떨어질 사람을 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를 풀때에도 명확한 답을 알 경우에는 바로 선택을 하지만 여러번 고민을 해야할 때는 답이 아닌 항목을 찾아서 먼저 지우고 한다. 채용의 경우에도 그렇다. 여러명을 비교할 때, 엄청 뛰어난 지원자가 아니라면 그리고 1차 면접을 통과하여 업무적인 능력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최종면접에 올라왔다면, 협력, 배려 이러한 덕목이 핵심 평가 기준이었을 것이다.
승무원 면접이 아니라 일반 면접의 경험이 많았더라면 면접관의 입장 및 면접장의 분위기 성향 파악을 하는 것을 먼저 신경 썼을 것 같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뼈아프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이후로 다른 면접에서의 합격률이 높았다.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 아 나는 이 사회에 필요가 없는 존재인가?' 이렇게 자존감이 낮아지기도 했다. 긍정적인 나였지만 졸업도 하고 나뉘 초조했다. 그리고 '승무원의 꿈을 왜 버리지 못할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막상 항공사 면접을 보다 보니 생각보다 승무원 되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 이었다. 감정이 흔들릴 때는 노래 가사가 나의 노래처럼 들려진다. '거위의 꿈' (카니발: 이적 , 김동률) 가사 중에서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혹시 내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아니 버려지지 않았다. 힘든 순간에 그 꿈을 구겨서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어느 새 다시 내 주머니에 들어와 있었다. 이때 나는 집 근처에 작은 초등학교를 자주 찾았다. 답답한 마음에 축구공을 들고 가서 골기퍼가 없는 그물에 가까운 곳에서 골을 넣었다. 난 할 수 있다 라는 동기부여를 위한 행동이었다. 작은 시도와 작은 성공은 매우 중요하다. 중학교때 농구를 즐겨했었는데, 농구에서 골을 잘 넣기 위해서는 골 밑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가장 골대와 가까운 곳에서 여러번 골을 넣고, 한 걸음 씩 더 뒤로 가면서 계속 연습을 한다. 그러면 나중에 3점슛 라인 넘어서도 골대로 공을 보낼 수 있고 골도 넣을 수 있다. 서류전형의 합격과 실패 면접의 합격과 실패는 어쩌면 그렇게 계속 골을 넣은 훈련의 연속이었는지 모르겠다.
좌절감 속에서도 나는 다시 긍정을 선택해야만 했다. 왜냐면 그것이 내 삶을 더욱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항공사를 포함 다양한 곳에 서류를 제출했다. 서류전형에 합격하기도 1차면접에 합격하기도 했다. 롯데그룸에 서류 합격후, 1차면접 합격 통보 까지 받았다. 승무원 면접을 준비하던 것이, 면접시 인상이나 자세 같은 면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많이 했다. 그러던 와중에 전주 KCC 공장에 '경영' 분야로 수시채용 공고가 났다. 정기채용의 경우 시험도 봐야하고, 면접 과정도 실무 면접 임원 면접등으로 나누어서 진행을 하는데 사람이 급하게 필요하여 서류 전형 합격 후 바로 최종면접이 진행되었다. 대학교때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회계 및 재무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경영전략, 마케팅, 인사, 노무 등.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사람이 필요한 곳은 회계/재무 파트였다.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잘 했는데, 회계 관련하여 기초적인 질문을 물어봤는데, 너무 엉망인 답변을 했다. 면접관이 쉬운 질문으로 나를 도와주려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안타까웠다.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엄청 아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업무분야가 내가 좋아하지도 잘 하지도 못하는 재무/회계 파트를 뽑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면접을 마치고 일주일 후 오전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약간 얼떨떨 했다. 승무원은 아니었지만 졸업을 했으니 직장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 아닌가?
그 날 오후 043으로 시작하는 전화가 울려왔다. 여러회사의 면접을 보면서 한성항공(현. 티웨이항공)에 3기 승무원 공채에 지원을 했었다. 보통 불합격자에게는 전화를 주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아니 2G폰을 쓰던 시절, 전화기 흑백액정에 043 번호가 보이던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왠지 좋은 예감. 잠시 숨을 고르고 '여보세요' 라고 한다. 항공사에 합격을 했단다. 너무나도 기쁜 순간이었다.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꿈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수많은 고뇌와 좌절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희망. 절망이 소망으로 바뀐 순간.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먼저 합격 시켜준 KCC에 전화를 했다. 오전에는 합격전화를 받고, 출근하겠다고 했다가 오후에 전화를 걸어 죄송합니다만 갈 수 없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지금 와서 , 여러가지 안정성 및 경제적인 부분, 집에서 근무할 수 있는 환경 등을 생각하면 어떠한 선택을 해야할지 고민이 필요할 수 도 있었는데 나는 1초도 고민되지 않았다. 아마 다시 돌아가더라도 선택은 같을 것이다. 한 곳으 나의 꿈이고 한 곳은 좋은 직장이니. 나의 선택은 무조건 꿈이었으니까.
꿈이 시작되는 순간 예상하지는 못했다. 이 꿈 같은 드라마가 헤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승무원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항공 서비스 및 항공 업무 관련하여 배우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일단 승무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