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한는 것과 나를 원하는 곳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나의 꿈이자 첫 직장이었던 항공사의 운항중단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직장이야 다시 구하면 되겠지만, 날개를 펼 수 없는 나의 날개는 어찌하랴? 저비용항공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타회사로의 이직 등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경력걔발 관점에서 보면 너무 준비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른 생각없이 앞만 보고 일했다. 그리고 다니던 회사가 운항중단 이라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신입 교육을 받을 때의 동기들이 생각난다. 동기로 합격을 했지만, 신생항공사의 여러가지 열악함과 높지 않은 연봉을 고려하여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퇴사를 한 동기들도 몇 있었다. 여러가지 많은 생각이 스쳤다.
운항중단으로 약 3개월 가량의 월급을 받지 못하고, 퇴직금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빨리 다른 직장을 알아 보아야 했다. 졸업을 하였고, 이제 나의 생계는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항공사로의 성공적인 이직을 가장 꿈꾸었다. 항공업에 종사를 하면서 지인분 께서 항공사 승무원은 아니나 항공사 지상직으로 타항공사의 추천을 제의하셨었다. 채용의 여러 경로가 있지만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이 추천 채용이다. 정시아 아닌 수시 형태로 인력의 공백이 있고, 추천을 통한 면접임으로 큰 결격 사유가 없다면 채용의 확률은 높다. 하지만 이때는 항공사 승무원을 계속 하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다양한 이직 전략을 생각하지 못했다.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는 기존의 경력을 살려서 항공사 승무원이 되는 것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지상직의 추천 채용 의뢰는 내게 온 또 다른 기회이기도 하였다. 일단 항공업계를 떠나지 않아야 승무원의 꿈을 다시 살릴 수도 있고. 또 승무직이 아니더라도 폭 넓게 생각하면 항공업의 다양한 분야 및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회사의 규모나 성장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여러가지로 좋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너무 확고한 목표와 기준이 있다보니, 그 때 당시의 나의 기준으로서는 그 제안에 대해서 정중하게 거절을 하였다. 기회를 기다리면서 다른 저비용 항공사의 채용에 지원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대형항공사의 경력이 아니다 보니 무언가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승무원의 경우 채용인원 자체가 적기 때문에 기회가 많지 않았다. 또한 현재 재직상태가 아닌 운항중단으로 인한 퇴사 상태가 큰 매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운항중단은 되었지만 이전 항공사가 사업자등록은 말소한 것은 아니며, 홰생절차등을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지원한 항공사에서는 그러한 부분까지 고려했을 수도 있다. 추후 처음 근무했던 항공사가 재개 했을때, 다시 돌아갈 수도 있으므로.
고향에 돌아왔고, 막막함 속에서 일단 살길을 찾아야 했다. 28살의 나이에 고3, 대학교 4학년 때에 미처 하지 못했던 진로에 대해서 다시 심도있게 고민을 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확고함이 부족했다. 여름철에 폭풍우가 쏟아져 와이퍼를 최고의 속도로 올려도 앞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내항공사에서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외항사를 준비해서 외항사로의 진출을 해야 하나? 생각도 하고 채용에 지원했다. 서류 합격을 하고 1차 영어 테스트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고향에 있던 중, 서울 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운항재개를 준비하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 는 연락이었다. 다음 인수자를 찾고 있느 과정임으로 급여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고, 식비 제공 정도 였다. 한 10일 정도 서울에 찜질방에서 보냈다. 급여를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회사를 재개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런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이 안 쓰러웠던지 선배가 괜찮냐고 물었었다. '네 저는 괜찮아요. 왜냐하면 인생의 성공 스토리를 쓰고 있는 중이거든요. 만약 나중에 성공 했는데, 어떤 어려움도 없이 운도 잘 맞아서 성공했다. 이러한 스토리는 매력이 없잖아요'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이라는 자그마한 실오라기를 붙잡고 싶어서 그렇게 무한 긍정이었나 보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는지, 10일 정도 있다가 나는 고향에 다시 내려왔다. 진행되던 일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열정페이로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도 계속 도와달라고 말하기 애매했던 회사의 입장도 있었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다시 취업준비를 하였다. 외국항공사에도 지원을 하였다. 나는 기초적인 영어회화를 하고, 외국인 만나는 것을 좋아했지만, 외국 항공사(외국 기업)에 취업할 정도로 체계적인 영어가 준비되지 못했다. 서류는 합격 했으나 1차 영어테스트에서 탈락했다. 일단 생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여유롭게 다시 인생을 돌아보고 방향을 정리하지는 못했다. 일단은 빠르게 무어라도 해야 했다. 매일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재취업을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다. 경제활동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그 의지 만큼은 확고했다. 나는 항공사 승무원을 서비스가 좋아서 시작하였고, 현 상황에서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가 어렵다면, 서비스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텔에서 경력을 인정 받으려면 호텔 경험이 필요했다. 외식업계라면 외식업계의 경력이 있어야 신입 취급을 받지 않았다. 즉, 항공사 승무원 경력을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피부로 느껴졌다. 이 경력을 살리기가 매우 쉽지 않다라는 것이 체감이 되었다.
꿈을 잃어 버린 순간이 바닥이라면 내 인생이 바닥을 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어서야 했다. 물속에 풍덩하고 빠졌지만 허우적 거리고 있을 수 없었다. 바닥으로 내려가 땅을 치고 다시 올라와야 했다. 바닥에서 힘을 내야 했다. 매일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채용공고를 보고 열심히 지원을 했다. 취업 및 이직센터를 찾아가 상담을 받기도 하고 할 수 있는 한 열심을 다했다. 당장 승무원 경력을 살리지 못한다면 신입이라도 다시 시작을 해야 했다.
그러던 와중 서울의 한 교육회사에 청년인턴으로 합격하게 된다. 중소기업에 청년을 채용하면 정부에서 급여에 관련된 일정 기간 동안 지원해 주는 그런 제도 였다. 당장 서울에 얻을 방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지인들을 연락해 일단 안정적인 거쳐를 마련하기 전까지, 원룸에 살기도 했다. 원룸에 사는 것이 여의치가 않아져서 신림동 고시원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친한 형의 도움을 받아 고시원 방을 구하기도 했다. 지하철역과 거리가 멀수록 고시원 가격이 저렴했다.
새롭게 취업한 곳에서 일단 열심히 하고자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기업 교육이란 부분도 좋았다. 기업교육회사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원격교육 사업이다. 스마트폰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는 도서를 통한 원격교육이 많았다. 리더십, 팀워크, 업무 역량 강화 등 이와 관련된 좋은 책을 읽고, 교육회사에서 제공한 질문 등에 답함으로서 일종의 셀프 업무 역량 강화 방식이었다. 또 다른 파트는 기업의 현장에서 리더십 및 팀워크 교육을 진행했다. 그리고 교육 완료 후 독특하게 연극을 직접 보여주었다. 1부는 대리가 주인공이다. 신입 때는 열정과 패기도 많았고 나름 인정받았던 대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신입사원에 치이고, 위에서 눌리는 그런 내용이었다. 꿈과 열정이 많았지만 조직에서 동기부여 및 리더십 부재로 인하여 초심을 잃어버리는 하지만 다시 열심히 일해보고자 하는 그런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기업 교육을 하면 보통 억지로 끌려온 직장인들이 많다. 그리고 여러시간 교육을 받다 보면, 지루하기도 하다. 일에 바쁜 직장인들은 문화생활도 하지 못하는데, 연극을 통해서 교육의 내용을 녹여서 보여 주면 수강생들의 반응이 좋다. 연극에 있는 대상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2부에서는 과장이 주인공이다. 고된 업무를 마치고, 2차 까지(술자리 회식) 마치고 집에 도착한다. 마누라의 바가지와 아들 녀석은 아버지가 보기에는 안정성이 떨어지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 일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은 격렬하게 대립하고, 아들은 '아빠가 지금까지 해 준게 뭐가 있어, 돈 그 따위 돈 나도 벌수 있어' 하고 심지어 집을 나가 버린다. 이 시대 가장으로서 힘겹게 살아가는 아버지. 그리고 그 아픔을 어디다 말할 수 도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다. 교육내내 무뚝뚝했던 교육생들이 하나 둘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리더십 메인강사가 따로 있었고, 교육 진행 스텝 업무 였다 .교육현장을 세팅하고, 교육과정에서 잘 참여할 수 있도록 퍼실리 테이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는 기업 연극에서 역할을 맡아서 진행해야 했다. 공연장에서 하는 전문 연기자 수준 까지는 아니지만, 교육생들을 울고 웃게 정도는 만들어 주어야 했다. 연기를 한다는 게 참 쉽지 않았다. 연극 2부에서는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우는 아들 역할을 연습했는데, 선배들 이야기가 대사는 격렬하게 화를 표출해야 하는 대사인데, 대사를 하면서 양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고 했다. 웃는 상이기도 하고, 승무원을 관둔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항상 웃는게 습관이 되어서 화를 내는 연기는 가장 어려웠다. 중소기업에 신입으로 가다보니 급여도 낮았다. 일을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장에서 꾸준히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급여, 흥미(적성,재미) , 성장성 이 세가지 중 한가지는 만족이 있어야 계속 그 생활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했다. 3개월 가량 근무를 하면서 이 길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 이야기를 하였고, 기업 연극 파트가 아닌 원격 교육 파트에서 원격 교육 책을 선정하고 그 안에서 교육 문제 등을 뽑고 그런 업무가 가능한지 물었다. 하지만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신입사원의 요구를 당연히 받아주지 않았다.
재취업 준비를 하면서 내일배움카드를 통해서 '서비스 강사' 관련 자격증 관련 수업을 신청했다. 주말에 듣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지만 경제상황도 나아지고, 다른 일을 하고 있더라도 관련 자격증이 있으면 서비스 관련 업무로 이직을 하기 위한 그러한 전략이었다. 주말에 시간을 할애해야 했지만, 관련 교육은 재미있었다. 역시 내가 의미를 느끼고 적성이 잘 맞는 일에서 자체적인 에너지가 많이 생기는 것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교육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당장 서비스 관련 업무로 일할 수 있는 마땅한 곳을 찾지는 못했다. 열심히 채용 사이트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고, 미용실 프랜차이즈 본사에 총무 업무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갈때도 그랬지만 학교 브랜드 보다는 학과에 중심을 맞추었다. 취업을 할 때에도 담당 업무에 초점을 맞추어서 지원을 했다. 총무 업무는 어찌 보면 잡다한 업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타부서 및 회사에 필요한 여러 서포팅 업무를 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서비스 업무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보는 관점이었다. 토요일 오전에도 일을 해야하는 부분도 있고, 지방 출장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항공사에서의 승무원 경력, 기내에서 마술도 했었고. 가맹점의 점주들의 교육 및 관리 면에 있어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면접시 반응이 좋았고, 결과가 나오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합격할 것 같은 좋은 분위기 였지만 과연 이길이 맞을까? 무언가 마음에 확신은 들지 않았다. 전혀 경험이 없는 미용업계 라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고등학교때 교회 선생님이셨던 전도사님이 목사님이 되어 중국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다. 좋은 스승님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리고 일전에 선생님 친척 중에 미용업 관련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얼핏 생각나서 미용업계에 대해 문의를 하고자 전화를 드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력서를 보내보라고 하셨다. 중국에 있는 한국이 사장님이 운영하는 귀금속 제조업체에서 해외영업사원이 필요한데, 만약 합격하게 되면 사람은 급히 필요하기 때문에 빨리 일은 해야한다고 하셨다.
첫날에 서류를 보내고, 둘째날에 전화로 면접이 진행되었다. 셋째날에 합격 통보를 주셨다. 나만 생각이 있다면 중국에 들어 오면 된다고 했다. 사람이 급하므로 빠르게 답변을 주어야 했다.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 취업에 합격을 했는데 나 중국에 가야할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나의 인생에서 내린 결정 중 가장 드라마틱한 결정이었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관적인 마음의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주위에서는 염려도 많았다. 어떠한 회사인지 잘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리고 한국이 아닌 해외로 취업한다는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린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중국어는 이,얼,싼(1,2,3)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중국에 대한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상으로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중국에 해외 취업. 예기치 못한 제안을 받았고, 직관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후에 상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그 당시의 중국행의 선택은 여러가지로 잘 한 선택이었다.
나는 항공 서비스를 놓아주어야 했다. 근무하던 항공사의 운항중단 이후,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다방면으로 항공사 재취업 및 서비스 직으로의 진출을 준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새롭게 어떠한 일을 배워야 할 지 고민하고 근무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중국에 가기전 항공사 근무하면서 알게 된 지인분의 추천을 받아 저비용 항공사 최종면접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그 분께서 이미 근무하던 항공사의 많은 지상직 인력들을 추천하여 이직에 성공을 시켰었고, 지상직 지점장의 추천자리라서 합격이 가능하리라 생각을 했었다. 최종면접에서 또 열정을 보여주고자 아이디어 하나를 발표했는데, '마케팅 업무에 맞지 않는가?' 하고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승무원의 길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았던, 그 길이 아니면 가고 싶지 않았었지만, '치열하게 사랑했기에 후회없이 떠나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놓을 수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감사하기도 했다. 원하는 꿈을 꾸고 노력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러한 마음의 결정 뒤에크게 고집하는 것이 없으니, 폭넓게 수용하고 선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직관적으로 나는 3일만에 중국으로 향하기로 결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