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국의 많은 제조 업체들은 중국의 연태, 칭다오 등으로 이전을 했다. 주로 노동력에 기반을 둔 업체들이었다. 중국에서 나는 한국인 사장님과 한국인 관리자들이 있는 귀금속 업체에 해외영업부에 새롭게 재취업을 하게 되었다. 중국어는 일단 조선족이 회사에 있으니, 차차 배우면 된다고 했다. 내가 일한 회사가 있는 곳은 '칭다오 자유무역 개발지구' 였다. 이곳에서 만든 제품을 주로 미국,캐나다로 수출하고 있었다. 무역지구는 칭다오 자유무역 지구 였지만 '황도'(황다오)란 곳이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실 나도 가기전에 알지 못했다. 칭다오와 인접한 도시라고 보면 된다.
칭다오 공항에 도착을 하였고, 칭다오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황다오로 이동을 하였다. 칭다오와 황다오가 'c' 자 형태로 되어 있어서, 배를 타고 가면 이동속도가 훨씬 빠르다. 처음 황다오 항구에 도착했을때의 생소함이 아직도 생각난다. 중국의 특유한 냄새와 항구의 냄새 , 1980년에 태어나서 그 당시의 환경을 잘 모르지만 무언가 과거로 온 듯한 그러한 인상을 받았다. 회사에서 숙식이 제공되었다. 공장 건물의 3층은 숙소가 있고, 조선족 아주머니가 끼니를 챙겨주셨다. 일단 숙식이 해결되어 다행이었다.
주말에 도착하여 잠시 회사 근처를 돌아 다녔다. 아직 중국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고 중국돈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큰 길 위주로 움직였다. 그 당시 KFC를 발견하고, 일단 들어갔다. 중국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할 수는 없겠지만, 보통 프랜차이즈에 들어가면 그림과 세트 메뉴 구성이 있어서 '1번 세트 주세요' 이런식으로 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나의 에상은 맞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봉착을 했다. 갑자기 내게 질문을 했다. '라더, 블라더?' 직원은 계속해서 물었고, 나는 정지 상태였다. 나는 1번 세트면 되었는데... 계속 못알아 들으니, 알아서 준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맵게 해줄 것인지, 그냥 해줄 것인지' 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다.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면서 '이,얼,싼(1,2,3)' 밖에 모르면서 너무 용감하고 무식하게 중국에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식사 메뉴도 하나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답답한 취급을 받아 버린, 무언가 위축이 되는 저녁이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새로운 환경과 업무 그리고 사람들에 적응을 해야 했다. 내게는 돌파구가 필요했으니까.
내가 속한 해외영업팀엔 한국인 관리자 2분이 계셨다. 해외영업 차장님과 이제 곧 회사를 떠나게 될 과장님 한 분. 인수인계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아서 그리고 그 동안 해외영업 업무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기존에 산업 분야는 다르지만 항공사에서 근무했던 경력 등을 반영하여 '대리'의 직급이 주어졌다. 해외영업 중국 직원들도 있었고, 그 중에서 실무를 꽤나 오래 담당한 직원의 직급도 대리 였기에 이러한 사항들도 반영이 되었다.
해외영업 업무를 하기 위해서 영어가 완벽하게 유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유창하면 유창할 수록 나쁠것은 없다. 영어회화나 영어작문을 외국에서 배운적은 없다.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시절 기회가 된다면 해외에서 어학 공부를 하는 것은 매우 추천을 한다. 해외에 나갈 사항이 여의치 않다면 국내에서 열심히 그것을 개발하길 바란다. 언제가 그것이 당신의 일과 삶을 사는데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 나의 영어를 평가했을때 회화는 중급 작문은 초급 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에는 흥미를 가지고 있긴 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외국인을 만나기는 어려워서 고등학교 때는 회화를 하지는 못했다. 승무원의 꿈을 세운 후, 그래도 영어 회화를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교때 교양으로 영어 수업들도 들었다. 부족한 나의 영어회화를 발전 시키게 된 것은 영어회화 모임을 통해서 였다. 어학당에서 수업을 받아도 생각보다 영어가 많이 늘지 못한다. 왜냐하면 수강생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말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꾸준한 반복이다. 운동처럼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여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큐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때 다양한 외국어 학습 방법에 대해서 책도 읽고 방송도 들었다.
어학당 수업을 들으면서 친분이 쌓인 한 분과 1:1로 영어회화 미팅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분도 나도 한국인이고, 유창한 실력은 아니었다. 우리는 EBS의 왕초보 잉글리시 교재를 외워서 연습하기로 했다. 대화에는 주제가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나서 프리 토킹을 했다. 대화를 하다가 너무 영어가 딸릴때는 짧게 한국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신기한 건 한국사람끼리 하는 영어회화지만 영어가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문법에 틀리거나 세련된 영어는 아니더라도 일단 나의 생각을 말하는게 중요하다. 영어가 부담감이 아닌 즐거움이 되어야 좋다. 편하면 자연스러워지고 공부도 재밌어 진다.
승무원이 되고 나서는 직장인 영어회화 모임을 통해서 영어를 잘 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인과 교류를 원하는 외국인들도 있어서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들도 주어 졌었다. 아무튼 그렇게 라도 조금은 발전시킨 영어가 있어서 해외영업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여러가지를 한 번에 적응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1. 새로운 회사에 대한 적응
2.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해외영업업무)
3. 새로운 산업에 대한 이해 (귀금속 제조)
4.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
5. 중국어 학습
6. 영어 능력 향상
무언가를 시작할 때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업고, 결핍이나 부족한 것들을 채워나가는 존재니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여서 절박함이나 이것을 꼭 해내야 하는 목적의식이 없다면 그것을 이룬 다는 것은 결연한 의지가 없이는 쉽지 않다.
돌이켜 보니, 사전에 미리 계획하지 않았고, 언어적으로나 인생계획에 없었던 중국해의 결심이 나중에는 여러가지로 나를 성장 및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든 곳을 떠난 낯섬은 즐거움이고도 하고 불편함과 외로움이기도 하다. 인생의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점이라서 그리고 새로운 나라 ,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생존' 하기 위해, 그리고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리고 많은 교훈을 얻게 되었다. 중국생활을 하면서 해외영업을 하면서 배우게 된 여러가지 것들은 다음편에서 또 이야기를 나누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