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 「컴 앤 씨 (1985)」

by 전율산
(1985)_Иди_и_смотри.mp4_20231123_050413.691.jpg

「Иди и смотри」 80/100


나는 여기 있어. 하지만 넌 살아있지 않아. 넌 새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귀가 멀고, 눈도 멀었어. 난 여기 있어. 여기.

Вот я. Зто ты не живешь, птиц не слышишь. Глухой, слепой… Вот же я… вот…

글라샤 (Глаша) - 「컴 앤 씨」


영화는 1943년 소련 연방의 벨로루시야에 있는 한 모래밭에서 모래를 파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느 모래밭에서의 소꿉장난과는 다르게, 두 소년은 탄 클립, 총 끈, 통신장비 등 각종 군용물품들을 파내고 있다. 그러던 와중 플료라는 모래사장에 묻혀있던 총을 발견하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헤실헤실 웃으며 파르티잔에 합류한다.

호기롭게 파르티잔에 합류했으나 작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후방에 남겨진 채 울며 숲을 걷던 플료라는 숲속에서 울고 있던 소녀와 만나게 된다. 둘은 울먹이는 서로를 보고 금세 눈물을 그치고 킬킬대며 웃는다. 소녀는 자신의 이름이 로자라고 밝히지만, 플료라가 실없는 소리를 하자 갑자기 소름 끼칠 정도로 태도와 목소리가 냉랭하게 바뀌고, 자신의 이름은 글라샤라 하며 플료라를 얼간이라 한다. 당황한 플료라가 뭐 하는 거냐며 묻지만 글라샤는 너야말로 뭘 하냐며,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А ты чего? Флёра! Чего ты здесь околачиваешься?") 그녀는 계속해 플료라를 매도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는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싶다("Я любить хочу. Рожать…") 말하다가도, 자신을 날려버릴 것이냐며 플료라의 수류탄에 손을 가져다 대고, 이를 뿌리치는 플료라에게 입을 맞추는 등 계속해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글라샤는 자신이 독일에 끌려갔다가 파르티잔에 들어오게 되었다고("Везли в Германию, а попала сюда.") 말한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한 동방총계획, 또는 게네랄플란 오스트(Generalplan Ost)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벨라루스를 침공하고, 이로 인해 당해 7월 벨라루스 서부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다. 게네랄플란 오스트란 레벤스라움 정책에 기반을 둔 나치 독일이 행한 인종 청소 계획의 하나로, 독일의 동부, 즉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서의 유대인과 슬라브계 민족들에 대한 절멸 및 노예화를 목표로 두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거나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고, 글라샤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1985)_Иди_и_смотри.mp4_20231123_034403.170.jpg

그렇게 둘이서 대화를 나누던 중 파르티잔 주둔지에 폭격이 가해져 잔류한 부대원들이 몰살당하고 공수부대원들마저 투입되자, 공황에 빠진 채로 비에 맞아 추위에 떨며 둘은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플료라는 나무를 쌓아 잠자리를 만들고, 둘은 추위에 떨며 부둥켜안고 잠에 든다. 그래도 둘은 곧 생기를 되찾고,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씻거나, 춤추고 장난치고 웃으며 그 나이에 맞는 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플료라가 살던 마을에 도착하나 마을에 인기척은 찾아볼 수 없고, 집은 비어있다. 하지만 화덕에는 아직 온기가 남은 수프가 남아있어 둘은 함께 그것을 먹는다. 그러나 글라샤는 이내 수프를 토해버리고,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플료라는 공황에 빠진 채로 플료라는 우물을 살펴보지만 우물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플료라는 마을 사람들이 다들 어디에 갔는지 알겠다고 말한다. 글라샤가 달려가던 플료라를 뒤쫓아가다가 뒤를 돌아보자 건물 앞에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글라샤는 다들 죽었다며 울부짖지만 플료라는 뒤돌아보지 않고 늪으로 들어가 허우적거리며 늪을 헤쳐나간다.

정신이 나가있는 플료라에게 글라샤가 마을 사람들은 다들 죽어버렸다고 하자 플료라는 글라샤를 웅덩이에 밀쳐버리고, 이를 보고 있던 루베쉬가 둘을 구해주자 글라샤는 플료라가 귀가 멀고 미쳐버려 자신을 죽이려 늪으로 끌고 갔다고 소리친다.

그들은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곳에서 플료라가 본 것은 독일군들이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로 간신히 숨만 붙어있던 촌장이었다. 플료라가 오자 촌장은 내가 뭐라고 했느냐며, 땅을 파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고("Говорил... говорил я вам... не надо, не копайте...") 한다. 사실 이러한 학살과 플료라의 파르티잔 신분은 전혀 관련이 없으나, 플료라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죄책감에 자살을 시도하고, 글라샤가 이를 말린다.


플료라는 루베쉬와 함께 행동하며 파르티잔 대원들과 식량을 구하러 떠난다. 폭격으로 인해 네 명 중 두 명이 사망하고, 그 자리에는 발목만 남아있다. 그러나 이를 보고도 플료라는 더 이상 충격받지 않는다. 전쟁이 그의 인간성을 서서히 파괴해가는 것이다.

남은 둘은 한 마을에서 젖소를 훔쳐 나오지만, 독일군의 사격에 루베쉬마저 죽어버리고 젖소는 총에 맞는다. 이 장면에서 실제 총에 맞아 죽어가는 젖소를 보여주며 그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파리가 달라붙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엘렘 클리모프가 관객을 전쟁터로 끌고 와 그곳에서의 죽음이 무엇인지 목도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야말로 와서 보라는 영화 제목과 어울리는 충격적인 장면이다.


안개가 짙게 깔린 다음 날 아침 깨어난 플료라는 이젠 완전히 죽어버린 젖소를 칼로 잘라내려 했으나 잘되지 않자, 한 농부의 말을 끌고 가려 한다. 농부는 난 동지가 아니냐며("А мы не люди?") 항의하지만, 플료라는 사나운 음성으로 그를 질책하며 그에게 총구를 들이민다. 이제는 그의 얼굴에서 앳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곧 독일군이 접근하는 소리가 들리고, 농부는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민 플료라를 도와 총과 군복을 숨기고 그에게 가짜 신분을 주어 페레호듸 마을로 데려간다. 마을에는 독일군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플료라는 마을 사람들을 저지하려 하지만 독일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헛간에 몰아넣고, 아이를 헛간에 남기고 나올 사람들만 창문으로 넘어오라고 한다. 플료라는 창문을 넘고, 독일군은 플료라를 끌고 간다. 뒤이어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창문을 넘지만 독일군은 아이를 빼앗아 창문 너머로 다시 던져버리고 여자를 강제로 트럭에 싣는다.

독일군의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요들 송이 어두운 배경음악과 뒤섞이고, 독일군들이 헛간에 불을 붙이자 그 많은 음악들 사이로 비명소리가 비집고 나온다. 독일군들은 이를 보며 웃고, 독일군 장교의 애완동물마저 이러한 잔혹한 광경에 눈을 돌리는 한편, 한 여자 장교는 이를 보며 랍스터를 먹고 있다. 이후 독일군들은 페레호듸 마을을 불태우고, 플료라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사진을 찍은 후, 정신적 충격에 기절한 플료라를 버려두고 떠난다. 이러한 장면은 상대방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즉 상대방을 비인간화된 대상으로 사고하는 시선이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 폭로한다. 한편 이 시점부터 플료라의 얼굴은 잔뜩 주름진 채로,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플료라는 숲을 걸으며 즐비하게 널린 독일군의 시체들 사이, 랍스터를 먹던 여성 장교가 한 쪽 가슴을 드러내고 입가에 토사물이 묻은 채로 죽어가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녀가 과연 파르티잔들에게 성폭행 당했음을 은유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어느 정도 쌍방에 대해 가해졌던 폭력에 대한 고발을 의도하지 않았나 싶다. 한편 플료라는 이를 보고 주위에 있던 붕대를 주워드는데, 이는 죽어가는 장교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부서진 총기를 동여매기 위한 것으로, 어느새인가 그 또한 상대를 비인간화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5)_Иди_и_смотри.mp4_20231123_051319.391.jpg

이후 파르티잔들이 떠나려 할 때, 숲에서 독일군들에게 잡혀 강간당했던 페레호듸 마을의 소녀가 입에 휘슬이 물린 채로, 휘슬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선 채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소녀에게서 플료라는 글라샤가 겹쳐 보이고, 플료라는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다 (Любить… рожать…)"고 중얼거리며 뒤돌아선다.

이 소녀를 연기한 배우는 스뱌틀라나 젤랸코우스카야(Святлана Зелянкоўская, 1977)로, 글라샤를 연기한 올가 미로노바(Ольга Миронова)와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따라서 둘은 다른 사람이고, 그저 플료라가 소녀에게서 글라샤를 겹쳐 본 것임을 유추할 수 있으며, 글라샤가 독일에 끌려갔다고 말한 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 보여준다.


붙잡힌 독일군 패잔병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장교는 자신이 파리 한 마리 죽일 수 없으며, 당신네 사람들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고, 그저 아버지처럼 규율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병사는 심지어 자신은 독일인이 아닌 소련인이며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기에 무고함을 주장한다. 1961년 12월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범 재판에서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말했고, 이를 지켜본 기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를 쓴다. 직책과 명령을 벗겨낸 장교는 그저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 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책 《포스트모던 윤리학 (Postmodern Ethics)》에서 '이성은 개인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충동을 억제 시키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대체하기 때문에 이성 자체가 비도덕적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보다 명령에 대한 수행을 더욱 중요시했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비이성적 명령에 따른 결과는 참혹했다.


한 파르티잔 병사가 횃불을 들고 달려온다. 소련인 독일군 병사는 명령에 따라 독일군들에게 휘발유를 뿌린다. 파르티잔 병사들이 총을 쏜다. 횃불을 들고 온 병사는 머뭇거리다 웅덩이에 횃불을 던지고,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 꺼진다. 분노의 연쇄고리가 끊어진다.


(1985)_Иди_и_смотри.mp4_20231123_052739.037.jpg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플료라는 광기 어린, 그러나 또한 울분에 찬 눈빛으로 웅덩이에 빠진 히틀러의 초상을 향해 총을 겨눈다. 화면 가득 잡히는 그의 얼굴은 이제 주름과 분노로 가득해 무서울 정도이다. 그러자 히틀러가 화면에 등장하고 영상은 거꾸로 돌아간다. 여러 영상이 번갈아가며 거꾸로 재생되고, 플료라는 초상에 총을 쏜다. 또 다른 영상들이 역재생되고, 플료라가 총을 쏘고, 히틀러가 나와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플료라가 총을 쏘는 것이 반복된다. 폭격의 소리, 클래식, 환호성, 병사들의 발걸음, 다양한 소리가 화면의 전환과 함께 정신없이 재생되고 플료라의 총성은 반복된다. 그러다 결국 시간은 끝까지 되감겨 영상은 아기 히틀러와 그 어머니를 보여주고, 플료라는 이를 쏘지 못한 채 총을 내리고 눈물을 흘리며 발길을 돌린다.

이전 장면에서 독일군 장교들을 심문하던 중, 아이들을 남겨두고 나오라 말했던 독일군 장교가 분노에 차 '모든 사람이 미래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Не все народы имеют право на будущее")'기에 '열등한 인종 (низшие расы)'은 번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온다. 글라샤가 먼저 했던 말, 그리고 플로랴가 곱씹은 말, '사랑하고 싶고(любить хочу)', '아이를 낳고 싶다(рожать…)'. 그들의 소원은 독일군들의 인종 말살 정책에 의해 미래에 대한 권리를 잃고 비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그러나 플로랴는 결국 아이를, 히틀러가 될 아이를 쏘지 못하고, 그 또한 누군가의 아들이고 인간임을 인식하며 전쟁이 얼마나 광기 어린 것인지 근원적인 폭로와 함께 플로랴에게 실낱같이 남은 인간성, 박애,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분노의 연쇄는 그렇게 끊어지노라 하고 암시한다.

또한 이는 작중 유일하게 플로랴가 총을 쏘는 장면인데, 그가 사격하는 대상이 진짜 히틀러도 아닌 그저 히틀러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전쟁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리고 전쟁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클리모프 감독은 직접적이고 강렬한 묘사를 통해 제목처럼 전쟁터에 관객을 끌어들여 보여주는 것과도 같이 하면서 전쟁의 잔인함과 비인간성,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의 무기력함을 성공적으로 고발해낸 영화. 글라샤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처럼 계속하여 반전을 거듭하는 분위기와 짙어지는 절망, 그러나 이에 침몰하지 않고 결국 비극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승화시켜낸다는 점은 이 영화를 완벽하게 한다.


마지막 장면 같은 여러 클립들의 병치(montage)는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 (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1925)」이 생각나게 한다. 러시아 영화에서 출발한 기법이니만큼 러시아 감독들이 잘 사용하는 것 같다.


관람 일자


2023/11/23

keyword
작가의 이전글#5 「키리에의 노래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