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타고 30일, 아프리카 - 18
이른 새벽부터 투어 차량은 다양한 숙소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차로 픽업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모이자 우리들은 아침 식사를 했다. 그동안 현지 직원들은 어떤 장소에 들러서 텐트, 식자재, 식기류 등 비품을 사파리 차량에 싣느라 바빴다.
서양인 다섯에 아시아인은 나 한 명. 이제 출발할 사파리 그룹원을 투어 첫날 아침에 만나서 알게 되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나와는 다른 업체와 계약했고, 나는 마지막 멤버로 염가에 팔아넘기듯 빈 좌석 메꾸기 식으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합류하게 된 거다.
그러다 보니 참가자별로 계약한 투어 일정이 조금씩 달랐다. 나와 청년 A가 가장 짧은 시간을 보내는 셈이었다. 나머지 참가자들은 모두 최소 5일 - 일주일간 사파리 투어를 즐기는 일정이었다. 여하튼 우리는 3박 4일 동안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한 후 누군가가 질문을 시작해서 각자 계약한 투어 금액을 비교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로 음식을 썰며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이 지불한 투어 비용과 일정을 공개했다.
이렇게 아침 식사를 코스로 즐기는 동안 나로선 난감했다. 내 사례(이전 글 참고)를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모두가 들고일어나 투어 회사와 싸움판이 될 거 같았다.
B, 네가 3박 4일에 800달러를 줬다고 했지?
A, 넌 같은 기간을 850달러에 계약해서 기분이 안 좋았지..?
C와 D, 너희는 5일 이상이라 1000달러가 훌쩍 넘어갔지..?
사실 난 3박 4일짜리를 630달러에 계약했어... 근데 다 돈 낸 만큼 제 값을 하는 거더라. 그러니 너무 아까워하진 마..
대나무숲에다가 이렇게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서로 이런 식으로 비교해 가며 어떤 멤버는 투어 첫날 아침부터 벌써 기분이 상했다. 나 또한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비용 면에선 실속을 챙겼다 쳐도 고상한 서양식 유머에 호응해 가며 이들과 장장 나흘을 보낸다는 게 쉽진 않았다.
첫날 오후엔 세렝기티로 향하는 도중에 응고릉고르 분화구를 잠깐 들렀다. 경치를 잠시 구경한 후 우리는 세렝기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반나절 이상 이동해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 해 질 무렵엔 생전 처음으로 초원에서 야생 동물을 보았다. 코끼리 무리 때와 사자 가족을.
드디어 버펄로 대이동을 보았다.
그 옛날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대이동을 두 눈으로 바로 앞에서 보다니. 이 감동도 잊을 수 없지만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사파리 차량들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하는지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노련한 가이드는 버펄로가 지나갈 게 확실해 보이는 길목에 정차했다. 그런데 일부 멤버는 더 잘 보려고 차량 지붕까지 올라가 앉으려고 했다. 이 순간 가이드는 위험한 행동이니 당장 내려오라고 여러 번 제지했다.
때마침 현장에 있던 국립공원 감독관은 이 광경을 목격했다. 사람이 사파리 차량 위에 올라가려고 하는 행동은 안전상 이유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우리가 탄 차량은 때마침 현장에 있던 국립공원 감독관에게 걸려서 가이드는 벌금을 물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차는 이런 처벌과 함께 미리 확보해 둔 명당도 포기해야만 했다.
감독관 명령에 따라 우리 차량이 목 좋은 자리를 포기하고 시야 확보가 어려운 맨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자 위험한 행동을 한 멤버 A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결국 오랜 시간을 다시 기다린 덕분에 우리는 동물들이 대이동 하는 모습을 영접할 수 있었다. 나 또한 이런 행동을 본능적으로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기에 멤버 A를 원망하고 싶진 않다. 누구나 인생에서 다시 보기 힘든 순간 아닌가.
버펄로와 정면으로 마주 보았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동물과 내가 시선 일치가 되었을 때, 상대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 순간 난 한낮 동물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상대에게 난 문명사회에서의 내가 아닌 그저 다른 생명체일 뿐. 이 감동을 빈약한 언어로는 전달할 방도가 없다.
이런 식으로 세렝기티를 누비며 다양한 동물들을 보았다. 장소를 옮겨 다니다 보면 이름 모를 종들을 포함해서 Big 5는 대개 다 보게 된다. 두 눈으로 영접한 얼룩말, 버펄로, 기린, 코끼리 떼 풍경은 지금도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새벽부터 사람이 아닌 동물 습성을 따라가며 하루를 보내는 거라 이른 저녁이 되면 다들 피곤해졌다. 어둑어둑해지면 사파리 차량은 세렝기티 공원 내 캠프 사이트로 돌아오고, 여행자들은 씻은 후 저녁 식사와 와인을 곁들이며 회포를 푼다. 씻고, 먹고, 피로를 푸는 시간이다.
세상과 단절하여 지내는 경험은 정말이지 신선했다. 이 해방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매일마다 체크할게 산더미인 온라인 감옥에서 탈출했으니 말이다. 스마트폰은 그저 카메라일 뿐. 인터넷은 바이 바이.
물론 문명 세계를 벗어난 대가는 따른다. 먹고 자고 씻는 게 어느 선까지 불편해질 수 있을까. 샤워실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공간엔 차가운 물만 찔끔찔끔 나오고, 그마저도 줄을 서서 고양이 세수만 겨우 했기에 다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대자연을 누비며 며칠을 보냈지만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해보겠는가. 평생 다시 하기 어려운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 또 감격하며 매 순간을 잊지 않으려 했다.
어제 그 소리 들었어?
텐트가 흔들리진 않았어?
새로운 아침이 되면 잠귀가 얕은 멤버들은 이런 질문을 해댔다. 그들 말로는 곰, 사자, 얼룩말, 자칼... 온갖 동물들이 한밤중 캠프장을 어슬렁거렸다는 거다. 사실 나도 선잠을 자는 동안 간간히 텐트가 심하게 흔들거리는 진동을 꽤 여러 번 느꼈다. 이게 세찬 바람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 텐트도.. 이들이 건드렸겠구나..?!! 이런 동물들이 캠프장을 누볐다는 사실에 다들 경악했다.
초원에선 낮이 더웠고 밤엔 싸늘하게 땅의 열기가 식어 추웠다. 온수가 안 나올 경우 샤워를 하려면 이른 저녁이 되기 전이 좋다. 재빨리, 물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씻어야 한다. 깜깜한 저녁이 되어서야 하루 일정이 끝난 날엔 다들 샤워를 생략했다. 평소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진 모르겠는데 내가 투어를 갔을 땐 더운물은 둘째치고 찬 물이라도 찔끔찔끔이 아니라 제발 제대로만 나와주길 바랐다.
직접 가보면 이곳은 분화구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여기에서 그 보기 힘들다던 코뿔소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여긴 얼룩말, 코끼리, 이름 모를 다른 동물 등 온갖 생명들이 어울려 사는 터전이다.
이곳에서 제일 기억나는 건 엄청 추운 밤날씨다. 분명 낮엔 여름인데 밤이 되면 습기 가득한 겨울 날씨로 변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텐트 밖에 둔 신발에 방울방울 찬 이슬이 맺혔다. 저녁에 세수를 할 땐 손이 시릴 정도로 물이 차서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밤에 잘 땐 침낭 2개를 겹쳐 입었다.
혹시 사자 봤어요?
잠잘 때 분명 내 텐트가 간간이 흔들리는 감은 있었기에 세찬 겨울바람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막상 다음날 다른 참가자가 내게 또 이렇게 물어보는 거다. 이 캠핑장에도 한밤중에 여지없이 사자, 얼룩말 등등 많은 동물들이 방문했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응고릉고르 지역엔 투어 첫날 잠깐 경유했다가 마지막 3일째 다시 되돌아와서 경치 구경 후 텐트 숙박을 했다. 사실 3일째 되니 응고릉고르고 나발이고 참가자들은 다들 체력 한계가 왔다. 나도 다른 이유로 지쳤다. 내내 혼자 여행을 하다가 영어로 듣기와 말하기 학습캠프를 3일째 강제 입문한 느낌이랄까.
나란 인간이 원래 과묵하고 냉소적인 데다가 빠르게 해치우는 혼밥에 익숙한 터라 서양인들과 어울렸던 투어 분위기를 유독 피곤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서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강조해 가며 긴 식사 시간을 보내는 게 신기했다.
'행복하다, 기분이 좋다는 말을 이렇게 많이 하는구나. 한국인이라면 할 수 없는 마음 표현인데.'
사실 어색했다. 이들이 매일매일 서로 기분을 확인하는 질문을 해대는 문화에 나도 얼떨결에 합류한 셈이었다. 이런 질문엔 답이 정해져 있다. 당연히 웃는 표정으로 "예스(Yes)"라고 대답해 주어야 한다. 같이 여행을 하는 참가자들이 내 컨디션을 신경 쓰지 않게끔 내 상태를 알려주는 기본적 배려랄까.
참 신기했던 게 가이드 2명에게 줄 팁(tip)을 상의할 때까진 이렇게 말투에 격식을 갖추며 예의를 차리더니 막상 제일 큰 과제인 팁을 해결하자 다들 말수가 없어졌다. 마지막 날이라 체력이 방전되기도 했고.
수많은 동물보다도 잊을 수 없는 건 하늘과 땅이었다. 누가 세렝기티에서 무엇이 제일 기억나는지를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3일 동안 사파리 차는 대자연을 누볐다. 그러던 중 내 마음속에 저장한 비현실적인 장면이 생각난다. 초원을 채우는 풀도, 나무도, 동물도 없이 오직 건조하게 말라붙은 흰 땅과 푸른 하늘 사이를 가로질렀던 순간이다. 동물도 없는 구역을 달리며 다른 사람들은 이 틈을 타 꾸벅꾸벅 졸았던 오후였다.
갑자기 이 어마어마한 풍경을 마주하니 기계처럼 사진을 찍던 두 손을 나도 모르게 멈췄다. 마음속에 평생 기억해 놓자고 다짐하며, 감탄사를 외치며.
지구에
이런 곳이 있다니.
아프리카 초원에 잠시 머물렀던 기억, 너무나 흔하디 흔하게 보았던 얼룩말, 버펄로, 기린 풍경. 다시 한국에 돌아오니 내가 과연 여기에 갔던 게 맞는지가 헷갈릴 만큼, 마치 신기루를 본 것처럼 사파리 투어에 대한 기억은 강렬하고 소중하다. 여긴 인간이 감히 정복할 권리가 없는, 동물이 살 수 있는 마지막 영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