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타고 30일, 아프리카 - 19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 산 근처에 있는 도시, 모시(Moshi) 까지는 현지 미니 버스 달라달라(Dala-Dala)가 다닌다. 아루샤 버스 터미널에 가면 탈 수 있다. 배낭여행을 하면 할수록 이렇게 현지인들과 섞이는 순간을 즐기게 된다. 비포장 도로를 느리게 달리며 거리 풍경도 감상하고 예산도 아낄 수 있다.
세렝기티 투어 전후로 1박씩 공짜로 묵은 숙소는 겉보기만 화려했다. 원기 회복을 위해 하루는 편히 먹고 자야 하는데 아쉽게도 숙소 여건이 영 아니었다. 더운 샤워물도 안 나오고 식음료값도 엄청 비쌌다. 말만 공짜 숙박일 뿐. 맥주 한 병에 5000실링이라니. 아루샤에서 묵었던 다른 숙소에선 3000실링에 시원한 맥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거의 두 배 값이다.
그래, 기운을 내자.
모시(Moshi)로 가자.
결심 후 아직 마르지 않은 눅눅한 빨래까지 빨래망에 다 담아 배낭을 꾸린 다음 뱃속에 오믈렛을 꾸역꾸역 씹어 넣었다. 과일이 몇 종류 담긴 접시도 같이 나왔는데 음식을 씹는 내내 속으론 궁금해졌다. '이게 공짜 1일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을까?'
만약 내가 자기네 회사랑 킬리만자로 등반 계약까지 안 맺는다면 이 식사값을 왠지 다 받을 거 같았다. 그러고도 남는 인간들이다.
어제부터 계속 식욕이 떨어지고 뱃속이 안 좋아 뜨거운 물을 텀블러에 가득 담았다. 다행히 숙소 사장은 사무실에 없었기에 맥주 두 병 값과 방 열쇠를 건네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원래 숙소에서 아루샤 터미널까지는 걸어가서 모시 터미널행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달라달라가 지나가는 게 아닌가.
차량 직원이 대로변에서 먼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덩달아 가까이 가며 모시까지 가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승객들까지 동양인 여행자가 신기해 보였던 걸까. 모두들 활짝 크게 웃으면서 내가 킬리만자로 쪽 모시를 간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며 일단 타라고 한다.
숙소 근처서 히치하이킹 식으로 탄 달라달라는 잠시 달리더니 아루샤 터미널 근처에 날 세워주었다. 탑승 요금은 500실링. 배낭 무게를 견디며 걷는 대신 달라달라를 붙잡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모르면 손 흔들고 무조건 물어보자.
아루샤 터미널까지 얼떨결에 초고속으로 도착해서 모시로 제일 빨리 출발하는 버스를 찾았다. 우선 몇 개 버스를 기웃거리며 직원들과 가격대를 물어보니 다 똑같다.
그런데 버스 안에 승객들이 얼마나 찼는지가 문제였다. 낌새를 보니 정원이 다 차야 비로소 출발하는 듯했다.
‘그래야 수입을 최대로 올릴 테니…’
그럴 법도 했다. 사람이 꽉꽉 찰 수록 돈이 더 들어올 테니까. 운전사들은 기를 쓰고 사람들을 붙잡으며 자기네 차량으로 태우려고 난리였다.
이젠 이런 난리 부르스에도 꽤 익숙해졌다. 이런 내가 신기하다. 여행 초반엔 버스를 타던 택시를 타던 현지인들이 내뿜는 리드미컬한 아프리카어에 정신줄이 쏙 나가곤 했는데, 어느덧 이렇게도 열심히 모객 하는 광경을 오히려 즐기게 된다.
결국 정원이 거의 다 찬 버스에 올라탔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거의 기다리지 않고 버스는 출발했고 모시 터미널까지는 2시간쯤 걸렸다.
다만 문제는 배낭이었다. 현지인들과 섞여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시골길을 달리는 건 좋았지만 내 짐이 너무 많았다. 큰 백팩은 버스 위 선반에 들어가지 않으니 그걸 내내 작은 보조 배낭과 겹쳐서 두 손으로 안고, 두 발로는 1.5리터짜리 생수병을 끼어서 버텼다. 나 때문에 좁게 앉아야 하는, 좌우 옆 아프리카 여성들에겐 속으로 무척 미안했다.
바나나가 있었지..!
간간히 정차하고 사람을 태우고, 내리는 게 반복되니 점점 짐을 바닥에 둘 만큼 공간 여유가 생겼다. 출출해지자 호스텔에서 아침 과일로 나왔던 바나나를 챙겨 온 게 생각났다. 옆 승객들은 안 그래도 창가 밖에서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에게 간식을 사 먹던 걸 보던 참이었다.
'휴지통용 비닐봉지가 없군'
바나나를 후딱 먹어치운 뒤 껍질은 손에 계속 쥐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쓰레기를 버리려 했는데.. 다들 다닥다닥 붙어 앉았으니 옆 사람 눈에 띌 수밖에. 내 오른쪽 창가에 앉은 나이 지긋한 아줌마가 갑자기 이 바나나 껍질을 자기 손으로 덥석 쥐는 게 아닌가. 그녀는 창문을 열더니 이걸 거리에 휙 버렸다.
고맙습니다.
미소를 머금고 목례로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게 바람직한 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현지를 여행하며 거리에서 쓰레기통이란 걸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내 왼쪽에 앉은 퉁퉁한 아줌마는 휴게 지점에서 간식용 구운 옥수수를 사더니 내게 잘라서 나누어 주었다. 이게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개눈 감추듯 바로 먹어버리니 역시 이 아줌마도 내 손에 있던 빈 옥수숫대를 집어서 창문 밖으로 던져준다. 달라달라 승객 간 에티켓일까.
세렝기티 투어 후 체력이 뚝 떨어진 상태로 모시 거리를 누비는 건 유달리 힘들었다. 아루샤에서 세렝기티-킬리만자로 투어를 같이 계약했다면 이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현지 투어사에서는 이렇게 같이 계약할 경우 보통 가격 할인을 해준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가격 비교를 해보니 처음 계약을 고려한 아루샤 현지 회사는 할인해 준다는 가격이 오히려 다른 데보다 훨씬 높은 게 아닌가. 결국 피곤하더라도 아루샤에서 모시로 와서 직접 킬리만자로 투어 계약을 하자고 결심한 거다.
아루샤에서처럼 모시에서도 관광객들은 투어 회사 삐끼들에게 입질 대상이 된다. 모시 터미널에 내리면 삐끼들이 자연스럽게 내 곁에 달려든다. 이때 누구든 한 명을 붙잡고 투어 회사로 데려가달라면 된다. 물론 한 군데만 가볼 순 없다. 한 회사에 들어갔다 나오면 바깥에선 어느새 다른 삐끼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면서 삐끼들은 내 앞에서 대놓고 싸우기도 했다. 큰 수입원을 놓치려 하지 않는 이들 모습이 치열해 보였다. 이 와중에 현지인들끼리 바이크를 타고 가면서 소매치기하는 걸 구경하는 건 덤이다. 아루샤에서부터 익숙해진 이런 난장판은 더 이상 난장판이 아니다.
'이건.. 체험 삶의 현장…?’
달라달라로 아루샤에서 모시로 이른 시간에 이동하면 당일 오후 중 킬리만자로 등반 투어를 알아볼 수 있다. 여행 날짜가 부족하다면 이렇게 시간을 활용해 보자. 다만 아루샤에서 세렝기티 투어 후 충분히 쉬지 않으면 이런 일정을 소화하는 게 피곤하긴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행자에겐 시간이 곧 재산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