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타고 30일, 아프리카 - 20
이 경험을 쓰기로 한 이유는 내가 계약한 킬리만자로 산 투어 회사가 탄자니아 현지에서 영업을 해온 지 3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수많은 현지 여행사 중 나름대로 안정적인 운영을 해온 곳이다. 이런 업체조차도 변칙적으로 무리한 영업을 하는 실정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혹시나 앞으로 현지에서 킬리만자로 등반 상품을 계약할 분들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내 사례를 공유하고자 한다.
당시엔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만큼 등반 가능한 날짜가 충분치 않았고, 산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총 3일 밖엔 없었다. 어떤 루트든 상관은 없었다. 다만 개별 가이드와 나만 3일 차에 따로 하산하는 조건으로 많은 인원이 모인 아시아인 그룹 투어를 계약하고 싶었다.
이런 조건을 원한 데에는 아래의 3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산을 오를 땐 음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실감해서였다. 부족하나마 과거 등산 경험을 통해 체력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시아인 그룹 투어라면 식사로 쌀이 나올 확률이 높을 거고, 당시엔 그 어떤 음식보다도 쌀을 원했다. 세렝기티 투어까지 마치며 서양인들 틈새에서 양식 위주 식사를 견디느라 남몰래 매일 지사제까지 챙겨 먹을 정도로 속이 불편했던 차였다.
2)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느냐는 등산 속도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 나는 느림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등반 속도가 뒤처질까 봐 걱정을 하던 차였다. 물론 관광객마다 1:1로 개별 가이드가 따라붙지만 다수가 함께 하는 그룹에 속하면 전체 등반 속도를 비교적 잘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3) 마지막 이유로는 팁(Tip) 문제 때문이었다. 포터, 요리사, 가이드에게 줘야 할 팁을 그룹 단위로 모으려면 투어 인원이 줄어들수록 개별 관광객이 부담해야 할 팁 금액은 늘어날 거라 예상했다. 안 그래도 세렝기티 투어를 할 때 팁을 그룹원끼리 상의하느라 골치가 아팠던 경험을 반복하긴 싫었다.
위의 이유 때문에 5-6개 투어 회사를 찾아다니며 3일짜리 등반 상품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런 투어는 없었다. 보통은 정상 등반을 목표로 킬리만자로 산을 찾기 때문이다.
결국 한 현지 여행사와 등반일 전날 계약을 했다. 5명으로 이루어진 아시아인 그룹을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였다. 그룹에 합류한 후 나만 등반 3일 차에 개별 가이드와 하산해도 무방하다는 안내를 받은 후 비교적 만족스러운 견적을 받고 투어 비용을 지불했다. 꽤 저렴한 수준이었기에 모시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는 교통비는 제외한 조건이었다. 더 이상 그룹 투어 중 팁 때문에 고민하는 게 싫어서 여행사 쪽에 가이드, 포터, 요리사별 1일당 팁이 얼마인지를 물어본 후 팁 전액도 계약 금액에 포함시켰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이건 크나큰 실수였다.
또한 이 여행사에서는 그동안 자기네 회사에서 투어를 했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만족스러운 후기들을 적은 공책들도 보여주었다. 내가 계약했던 책상 위에 마침 4일짜리 등반 투어를 계약했던 한국인 관광객 계약서가 놓여있는 걸 보기도 했다. 이런 자료들을 확인한 후 나름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여행을 하게 된 점을 당시엔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산속에서 보낸 3일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우선 내가 묵었던 숙소까지 투어 회사에서는 정각 8시까지 픽업 차량이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30분 이상 지나도 차량은 도착하지 않았다.
'먹튀를 한 건가..?'
뭔가 불길했다.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차에 숙소 직원도 나보고 투어 회사가 어디냐고 묻는다. 내가 계약서 영수증을 보여주자, 이 회사는 믿을 수 있다고 말하며 기다리라고 직원은 다시금 나를 안심시켰다. 또한 영수증에 나와 있는 회사 번호로 왓츠앱을 통해 전화 통화를 시도하자 해당 직원이 전화를 받고 나서 나를 10시에 픽업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내가 아는 바와 다르다고 따졌더니 자신은 모르는 일이란다.
이런 소동을 겪는 와중에 투어 회사 직원이 활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8시 반이 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왜 시간 약속을 이렇게 안 지켰는지 묻자 일단 왔으면 된 거 아니냐고 한다. 투어 회사 사무실엔 9시까지, 킬리만자로 산 입구에는 10시까지 도착하면 되는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하지만 8시 픽업 시간 외엔 이런 일정들은 모두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 직원은 내 투어 계약을 직접 진행했고, 내 숙소 위치를 알기 위해 어제 숙소까지 동행했던 남자였다. 당시 그는 숙소 앞에 도착하자 갑자기 자신이 나를 위해 같이 걸어왔으니 되돌아갈 교통비를 현금으로 달라고 요구하길래 질이 안 좋은 인간이라 여기던 차였다.
픽업 관련해서 구두로 오고 갔던 얘기들은 어디 기록에 남지도 않았으니 화가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클레임을 하는 선에서 앞으론 시간 약속을 지켜달라고 말하는 수 밖엔.
이후 오전 10시경 킬리만자로 산 마랑구 루트(Marangu Route)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혼자 2시간여 동안 나머지 멤버들을 기다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투어 회사에서는 거짓말들을 꾸며내었다. 아래 문장들은 모두 가이드가 했던 말이다.
투어 멤버들이 각자 숙소가 다르니 픽업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중이다. 기다려달라.
그래서 기다렸다. 등산을 할 예정이라면 다들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날 텐데, 이렇게 늦게까지 픽업이 안 되는 상황이 이상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기다렸다.
우선 다른 멤버들이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 간 점심 도시락을 먹어라. 식사를 해야 등반을 시작할 수 있다.
다 같이 멤버들과 밥을 먹어야지, 그룹 투어인데 나 혼자 밥을 먹기는 싫다고 했다. 그러니 이들은 멤버들 숙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픽업 시간이 그만큼 많이 걸린다고 말했다.
일단 다른 멤버들이 너무 늦으니 내가 먼저 출발해야 한다.
나 먼저 등산을 시작하라는 말에, 이제는 내가 투어 회사 담당자와 직접 전화 등으로 연락을 취하기 전까지는 등산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가이드에게 단언했다. 왜 늦는지에 대해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투어 회사에서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오늘 아침까지 픽업 시간을 어기면서 등산로 입구까지 차로 동행한 투어 회사 직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가버린 후였다.
가이드는 이때부터 나를 힘들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단 등산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 너무 늦어졌고, 안전히 산을 올라가려면 지금은 출발을 해야 한다고. 게다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 배낭 짐을 포터와 요리사가 들고 산 위로 먼저 출발한 뒤였다.
당시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등산을 안 하겠다고, 환불을 해달라고 버티고 싶어도 내 손에 배낭 짐 전체를 확보한 상태가 아니니 일단 산을 오르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다.
오늘 머무르게 될 산장에 도착하면 나머지 멤버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거다.
등반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가이드를 의심했다. 여자 혼자 남자 가이드와 단둘이 약 4시간 등반을 하는 동안 다른 멤버들이 어디 있냐는 질문을 한 열 번은 한 거 같다. 불안한 상태에서 질문을 반복했지만 가이드는 이미 멤버들이 등반을 하고 있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산속에선 내 스마트폰도 전화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데 이곳 현지인들이 쓰는 전화기로는 투어 회사와 통화가 가능하다는 건가? 그리고 왜 내가 투어 회사와 통화하도록 전화를 바꿔주지 않는 건가? 의심은 깊어만 갔다.
(산장 도착 후) 다른 멤버들은 이미 식사를 마쳤다.
나보다 늦게 출발했어야 하는 나머지 멤버들이 동일한 마랑구 루트에서 나를 앞질러 갔다는 건 불가능했다. 등산로는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나를 지나쳤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모순된 설명은 뭐란 말인가. 당연히 그룹 투어인데 왜 나 혼자만 식사를 하게 하냐고, 멤버들과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는 다른 이들이 따로 식사를 마쳤다는 설명만을 반복했다.
결국 일단 나 혼자 저녁 식사를 마쳤다. 이때부터는 의심과 불안을 넘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다른 멤버들은 사실 오늘 올라오는 도중에 등산 루트를 변경했다.
이게 내가 1일 차 등산을 마친 후 산장 침실에서 가이드를 불러 세워 자초지종을 따졌을 때 최종적으로 들은 말이다. 그가 한 말은 투어 회사에서 꾸며댄 거짓말임을 직감했다. 이 설명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에 있는 여러 루트들은 각각 올라갈 때 준비해야 하는 장비도 다르고, 투어 비용 자체가 다르다. 또한 등산로별 출발 지점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내가 선택한 마랑구 루트를 올라오는 도중에 다른 길로 비켜가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또한 등반을 하려면 킬리만자로 국립공원 쪽에 등반료를 사전에 완납해야 한다. 그런데 등반일 전날 오후에 갑자기 나머지 멤버들이 루트를 변경했다고?
'일단 산에 나를 들이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어떻게 저런 순박한 거짓말들을 늘어놓아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치솟자 투어 회사도, 가이드도 너무나 괘씸했다. 가이드가 저렇게 대답하자 결국 하루 종일 눌러놓았던 화가 결국 폭발했다. 영어로 오늘 하루 동안 그가 내게 했던 거짓말들을 나열하며 조목조목 따졌다. 그러니 가이드는 투어 회사에서 자기에게 전달한 바 그대로 내게 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내가 하도 화를 크게 냈고, 언성을 높여서 영어로 싸웠기에 나와 같은 침실을 썼던 3명의 여행객들 뿐만 아니라 이 날 산장에 묶었던 모든 현지 일꾼들, 다른 객실에 묶었던 등반자들은 눈치로 내 상황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당장 투어 회사에 유선으로 연락을 취하라고, 내일 나는 산을 내려갈 거고 등산을 더 할 마음이 없다고, 그룹 투어라고 거짓말을 해 놓고 여성 혼자 산속에 들이밀어놓는 건 한국에선 심각한 등반 사고라고 큰 소리로 가이드에게 따졌다.
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힘없는 일개 직원일 뿐이었다. 가이드 또한 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내 요구대로 자신이 가진 현지인용 전화기로 늦은 저녁, 투어 회사에 연락을 시도했다. 산 속이라 전화가 잘 터지지 않아 그나마 전화가 터지는 지점을 찾아 야외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연락을 시도했다.
마침내 회사 쪽과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하루종일 참았던 화를 쏟아냈다. 이건 엄연히 등반 사고이고, 계약 위반이라고, 내일 하산하자마자 모시 현지에 있는 경찰서로 바로 이동할 거고 탄자니아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할 거라고, 그리고 내 이름과 동반 가이드, 계약한 투어 회사 이름이 마랑구 루트 입구에 있는 관광사무소 명부에 등록되어 있으니 내일 하산하면 바로 이 국립공원 사무소부터 들러서 당신네 회사를 고발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I'll give back your money!
일단 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전화기 넘어 투어 회사 쪽 관계자는 자신들이 환불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럼 얼마나 돌려줄 건지를 물어보자 다시 저쪽에서는 침묵했다. 이런 행동은 불난 집에 불 붙인 듯 내 화를 돋울 뿐이었다.
이건 단지 돈 문제가 아니었다. 여행객에게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등반 기회는 소중한 시간이다. 여행사에서는 돈 이전에 왜 이런 사고가 생겼는지 설명을 했어야 했고, 내게 사과도 했어야 했다. 이 시간을 공포와 스트레스 상태에서 보냈으니 이미 기분 좋게 등반할 시간 자체를 망쳤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더 이상 여행사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에 하산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전날 저녁에 격노한 후 길게 잠을 못 잤다. 새벽 5시가 채 안 되어 눈을 뜨자마자 아이패드를 켜고 자초지종을 영어로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어제 가이드에게 단언한 대로 킬리만자로 국립공원 쪽에 여행사를 고발하는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침 식사 시간 전까지 상세한 글을 작성 완료한 후 가이드를 만났다. 그런데 이 반응은 도대체 뭔가.
오늘 등반할 준비되었나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이드는 미소를 지으며 아침 인사를 했다. 기가 막혀서 어제저녁 있었던 일을 기억 못 하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다시 그는 말이 없었다. 난 당신네 여행사를 고발할 거라고, 그 외에 내가 어제 했던 말들을 그대로 실행에 옮길 거라고 반복해서 말해 주었다.
우선 가이드를 시켜서 산장에 근무하는 국립공원 직원을 불렀다. 그리곤 직원에게 등산로 입구에 있는 사무소에 당장 연락을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이패드에 적어뒀던 여행사 고발 글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네트워크 상태는 열악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적은 글을 사진으로 찍어서 직원이 가진 기기로 국립공원 쪽에 전송해 주기로 했다.
그다음 가이드에겐 산장 직원을 통해 여행사와 연락을 취해달라고 말했다. 전날 가이드가 가진 이동전화로는 통신 상태가 안 좋아서 제대로 된 의사교환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산장 사무실 내에 좀 더 통화가 원활한 기기가 있다면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장비는 아예 없었다.
등반을 거부한 채 아침부터 이 소동을 벌이며 버티자 가이드는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그도 나름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피해자라는 거다. 이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고, 자신은 나 한 명만 가이드하면 되는 거라고 알고 이 일을 맡았다는 거다.
이젠 다른 여행 그룹을 인솔하는 가이드까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담당 가이드 또한 피해자라는 걸 현업 종사자로서 뻔히 아는 듯 보였다. 다른 가이드는 말했다. 이 상황은 비정상적이고 도저히 있으면 안 되는 일이기에 여행사에서 당연히 나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내가 메일이나 문자, 전화 등으로 따로 요구를 해야 할 거라고. 하지만 여행사에서도 이미 국립공원에 지불한 등반료는 반납이 어려울 거라고. 그러니 일단 등반을 하라는 거다. '하쿠나 마타타'라면서.
이때부턴 정말 화병이 나길 시작했다. 그들의 낙천성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보상도 안 되니 일단 즐기라고?
한편으로는 슬슬 안전 문제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전날엔 이성이 정지된 상태라 신변 안전에 대해 제대로 가늠하질 못했다. 한 잠 자고 나니 머리 회전이 슬슬 되면서 산에서 내려간 다음이 걱정되었다. 가이드에겐 하산 직후 모시 경찰서로 직행해서 탄자니아 한국 대사관에 바로 연락을 취할 거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여행사에서 내 행동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막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최악의 상황에 대한 상상이 올라오길 시작했다.
'인신매매하듯 무력으로 끌어서 자기네 사무실로 끌고 가면 어떡하지? 내 짐은 어떡하고..?'
경찰서에 가서 대사관에 신고하겠다는 생각은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순진한 발상이었다. 아프리카의 치안은 우리나라 같은 수준이 아니다. 관광 지역을 벗어나면 여행객은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특히 미국인 같은 경우 달러도 많고 마약도 소지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더욱 도둑들의 먹잇감이 된다는 얘기도 현지인에게 듣던 차였다.
'오늘 하산하면 모시에서 이틀은 지내야 하는데, 과연 안전할까?'
확신할 수 없었다. 예정된 등반 기간보다 일찍 하산하면 다음 여행지인 이집트로 출발하는 날까진 모시에 있어야 했다. 비용 낭비는 둘째치고 이 코딱지 만한 동네에서 숙박한다는 게 불안했다. 어디서 머물든 여행사에선 내 위치를 손바닥 지문 들여다보듯 쉽사리 알아낼 것 같았다. 물론 명확한 근거도 없이 이런 확신을 하긴 어렵다. 하지만 여행자는 약자 아닌가. 자기네를 협박했다고 여긴다면 상대 쪽에선 현지식으로 무슨 짓이든 할 거 같다는 상상을 떨치긴 힘들었다.
이런 암울한 예상이 들자 일단은 '산 위가 안전하다, 자더라도 산 위에서 자자'라는 결심이 섰다. 원래는 3일 차 하산일 오후에 바로 모시 공항까지 직행하려 했지만 그전에 잠깐 여행사를 들르기로 했다. 가이드를 불러서 내 일정을 전하고 결국 2일 차 산행을 시작했다.
이미 등반은 망쳤다고 여겼다. 그저 둘째 날 묶을 숙소를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행 내내 가이드와 나는 서로 동상이몽 상태였다. 그는 내가 듣기 좋은 말을 쥐어짜 내느라 애를 썼다. 그는 필사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듯했다. 가이드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여행자가 불만족하면 책임을 가이드가 짊어지는 건가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이드는 여행사 쪽 지시대로 열심히 내 기분을 풀어주려 했던 것 같다. 내가 기분이 좋아지면 이 모든 상황이 좋게 마무리될 거라는 기대를 했던 걸까..?
이런 짐작이 드는 이유는 등반 도중 그가 자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갈 시간이라는 핑계로 그는 간간이 나와 거리 간격을 두곤 했다. 사라진 후 다시 나타날 때엔 그는 내가 솔깃할 만한,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새로운 제안을 해댔다. 예를 들면 내가 등반을 3일밖에 안 하지만 정상 등반 확인서를 받게 해 주겠다는 식이었다.
참고로 킬리만자로 정상 등반에 성공한 등반객은 하산 후 루트 입구 사무소에서 등정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상식적으로 이런 건 가이드가 단독으로 마음대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일 차 당시를 돌이켜보면 내가 없는 상황에서 가이드는 자신이 가진 기기로 여행사와 접촉하며 내 상태를 공유했고 여행사 쪽 제안을 내게 전달했다고 본다.
이런 사탕발림 말을 끝없이 듣는 게 피로해지자 가이드에게 다시 분명한 의사를 전달했다. 나름 애쓰고 있다는 걸, 당신 또한 피해자라는 걸 알지만 나 또한 한 말은 반드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라고. 하산 후 여행사에 방문해서 등반 계약 위반에 대한 환불을 요구할 거고, 한국에 돌아가면 이번 등반 사고에 대한 글을 써서 온라인상에 업로드할 거라고.
2일 차 등반을 마무리하기까지 다행히 고산병 증상은 오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다리는 무거워지고 발걸음도 느려졌지만 몸 상태가 괜찮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산행 중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등반객들을 꽤 보았다. 둘째 날 묶었던 산장에서도 고산 지대 적응이 어려워 골골대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등반객 중 내가 꼴찌로 산장에 도착했다. 아침에 소동을 벌이느라 제일 늦게 첫날 묶었던 산장을 출발했던 탓이었다. 그 와중에 가이드는 내가 여행사 쪽에 총 얼마를 지불했는지를 궁금해했다. 이 부분 또한 사실 낭패였다.
'내가 미쳤지, 왜 여행사를 믿고 3일 치 팁까지 전부 줘 버렸을까..'
등반 사고를 겪을 줄은 몰랐으니까. 내가 직접 줄 돈을 남에게 맡기다니, 돌이켜보면 너무 순진했다.
가이드는 난감해했다. 그는 여행사 쪽에 한 번 들어간 돈은 나오질 않을 거라고 말했다. 영수증 상에 팁 명세가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계약 당시 팁 포함 내역을 기재해 달라고 요청은 했었다. 그러자 담당 직원은 아래와 같은 메모를 영수증 뒷장에 끄적여 주면서 이걸로 다 된 거라고 답했다. 원래는 'all paid'라고 쓰려했었겠지만 스펠링도 틀렸다. 무엇보다도 그걸 그냥 보고 넘겼던 내가 참으로 멍청했다.
전날부터 가이드의 관심사는 팁이었다. 외국인인 나나 가이드나 결국 여행사 앞에선 약자라는 인식을 함께 하면서 2일 차부터는 서로 조금이나마 속마음을 터놓게 되었다. 일단 등반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은 후엔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가이드를 존중했다.
가이드는 내가 무섭게 화를 낼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는 느낌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도 힘들었다는 건 나도 안다. 그도 여행사에게 속은 직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후부터는 가이드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6-7시간에 걸친 하산 과정 동안 그는 내게 여행사로부터 팁을 받아내 달라고 부탁했다. 나 또한 환불을 요구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하산 직후 여행사 사무실을 함께 방문해야 하는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했다. 따라서 하산 후 여행사까지 가이드 등 일꾼들과 차를 동승하는 건 일단 안전하리라 여겼다.
가이드는 좀 더 편안하게 허세를 떨면서 여행사를 다녀온 후엔 자기 집에 들렀다가 샤워를 하고 가라는 말도 했다. 나름대로 내게 베푸는 호의라고 여기는 듯했다. 또한 자신이 여행사와 나 사이에서 환불 금액 협상이 잘 되도록 중재하겠다는 둥 여러 감언이설을 했다. 하산 후 등산로 앞 현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여행사 차량을 같이 기다릴 때까지 그는 내 앞에서 편하게 먹고 자유롭게 떠들었다.
그런데 여행사 사장 앞에서 그가 보인 변화를 보고 속으로 경악했다. 이때 나도 같이 공포를 느꼈다.
가이드, 포터, 요리사 모두 내가 여행사 쪽에 맡겨둔 팁을 받아내야 했다. 사측에서 보낸 차량이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자 건장한 세 남자는 뒷자리에 나란히 몸을 구겨 탔다. 난 모든 배낭 짐을 확보한 채 앞자리에 탑승 완료. 그대로 차량은 여행사로 향했다.
'여행사 사무실에 문이 활짝 열려있는 상태 그대로이겠지?'
불안했다. 협상이 잘 안 될 경우 내가 경찰이든 어디든 신고할 걸 막기 위해 저 쪽에서 무력으로라도 나를 막으면, 그때 문이 닫혀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상상이 엄습했다.
'우선 배낭을 절대 내려놓지 말아야지. 어깨 끈을 유지하고 자리에 앉자. 문 가까이에..!!'
속으로 별별 시나리오를 다 쓰는 동안 어느덧 차량은 여행사에 도착했다. 사무실은 처음 계약 당시처럼 야외 쪽 문이 개방되어 있었고, 처음 보는 나이 많은 직원이 사장석인 듯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사장인 듯했다. 이런저런 말들을 들어보면, 원래 등반을 가기로 한 아시아인 그룹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온천 투어를 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덧붙여 자신이 오랫동안 이 회사를 일구어 왔고, 여기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등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 말은 지금도 전혀 믿지 않는다. 국립공원 측에 킬리만자로 등반료를 지불하면 반납은 어렵다는 현지 가이드 말을 이미 들은 바 있기에 여행사 사장의 설명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게다가 1일 차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거짓말 행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한국이든 외국이든 여행사에서 한 번 가져간 계약금은 고객이 등반일 전날 단순 변심했다고 해서 계약을 파기시키고 원금 그대로 되돌려주지 않는다. 절대로.
나도 사장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아시아인 그룹이 등반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내게 사전에 알렸어야 했다. 당신들은 내게 약속한 계약 조건(아시아인 그룹 합류)을 위반했기에 나를 통한 투어 수입을 챙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미 대납을 요청했던 3명의 일꾼(가이드, 포터, 요리사) 팁은 지금 이 자리에서 현금으로 직접 전달되면 좋겠다. 또한 일단 3일의 등반을 마친 건 산 위에서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따라서 3일 치 국립공원 입장료는 환불받지 않겠다. 이를 제외한 계약금액 전액을 환불해 달라.”
결국 내가 요구한 금액을 환불받았다. 이젠 팁을 건네줄 순서다. 이때부터 속으로 당황스러웠다. 사실 사무실로 들어선 후부터 줄곧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내 앞에선 웃고 자유롭게 떠들던 가이드 등이 갑자기 표정이 굳은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거다.
일꾼들은 사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뭐랄까.. 사무실 분위기는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조폭 소굴과도 비슷했다. 아프리카 말을 모르더라도 느꼈다.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경직되었음을. 나 또한 보조배낭을 앞에 맨 채 몸에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사장은 기선을 잡듯 일꾼들에게 명령했다. 자신이 내게 팁을 현금으로 건네면 여행자인 내가 그들에게 직접 팁을 전달할 것이라고. 그때 감사의 표시를 정중하게 하라고.
사장이 내게 건네준 현금을 나도 다시 가이드, 포터, 요리사 몫으로 나누도록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이드에게 대표로 전달했다. 가이드는 사장이 시키는 대로 내가 건넨 팁을 받으며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팁을 수령하자 3명의 일꾼은 사라졌다.
이 3명의 남자는 등산 2일 차부터 나를 편하게 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보스 말에 꼼짝도 못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주인과 종 관계라고나 할까..? 사장 앞에서 내 의견을 대신 전하겠다는 말을 떠벌리던 가이드 또한 사장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이 지긋지긋한 등반이 끝나고 모시를 탈출하게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킬리만자로 등반을 망쳤다는 허탈함 때문이었을까. 모든 대화가 마무리되고 여행사 차량으로 모시 공항까지 가게 되었을 때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사장은 내가 막판에 보인 반응에 당황한 듯했다. 돈을 되돌려주면 내 불만을 잠재우리라 여겼던 걸까. 그가 어떤 상태든 간에 난 얘기가 끝나자마자 여행사를 빠져나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투어 비용 중 일부는 환불받을 수 있었다. 전체 투어비 중 20%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돈을 되찾은 게 보상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여행자에게 가장 큰 재산은 시간 아닌가.
많은 배낭여행자들은 현지에서 킬리만자로 등반 상품을 찾는다. 대부분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등반을 경험할 거고 나 같은 사례는 흔치 않을 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사기를 안 당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모르겠다.
한국 쪽 여행사를 통해 계약을 하고 되도록 단체 투어를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끔 육개장 같은 그리운 한식도 식사로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이리라. 비용이 비싸더라도 말이다.
모시에서의 며칠을 돌이켜보면 이렇게 고생한 시간조차도 여행의 일부라고 여기고 싶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봐야 하는 성격 때문에 어쩌면 이들 말대로 '하쿠나 마타타' 식 등반을 못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 또한 내가 감당했어야 할 몫이리라.
덧 1. 여행자 1명당 가이드, 포터, 요리사가 동행 등반한다. 이게 킬리만자로 국립공원에서 정한 규칙이라서 따라야 한다고 들었다. 결국 단독, 그룹 등반 상관없이 여행자별 지출해야 하는 팁 총액은 아래와 같다.
(총 등반일 수) x (3명 Tip) = (여행자 1명당 Tip 총액)
보통 고참 일꾼이 여행자가 주는 팁 총액을 받아가고 나머지 일꾼들과 일정 비율로 배분한다. 내 담당 가이드는 가장 연장자였고, 무엇보다도 가이드였기에 가장 많은 비율을 가져갔다.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포터와 요리사는 나이가 어렸다. 이들은 내가 지불한 Tip 총액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을 받아갔다. 이들은 모두 여행사로부터 제대로 임금을 챙겨 받지 못하고 Tip으로 충당하는 듯했다. 따라서 여행자가 주어야 할 Tip을 깎는 건 현지 실정 상 야박한 행동이다.
덧 2. 사실 등반 2일 차 때 담당 가이드는 내게 요리사 및 포터 팁을 따로 챙겨달라고 부탁했었다. 내 등반 사고로 인해 자신은 Tip을 못 받을 거라고 여겼기에 이런 부탁을 내게 따로 했었다. 난 당시 달러 현금이 부족했고 현찰은 1유로 한 장 밖에 없었기에 이걸 산장에서 요리사에게 따로 주었다.
그런데 이 젊은 요리사는 이 사실을 나머지 일꾼(가이드, 포터)에겐 말하지 않았다. 하산 후 여행사에서 나를 통해 받을 팁 외에 1유로는 혼자 더 챙기려 했던 속셈이었으리라.
이들에겐 단돈 1-2달러가 하루 일당 수준이 될 만큼 정말 큰돈이다. 난 하산길에 가이드에게 젊은 요리사에게는 내가 따로 1유로를 주었다는 걸 말해줬다. 그러자 가이드는 내 앞에서 표정이 썩어 들어가며 분개했다. 자신은 젊은 일꾼들을 위해 여행자에게 따로 팁을 달라는 부탁까지 했는데 이놈은 정작 딴 주머니를 챙기고 입을 닦은 셈이라고 여겨서였다.
난 결과적으로 여행사에 맡겨둔 팁 총액에 1유로를 더 얹어준 셈이었다. 그리고 하산길에서 가이드는 말했다. 내가 1유로를 요리사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았으니 따로 요리사에게 말해서 자기네들끼리 1유로를 나눌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