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함께한다고 해야 할지...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부터도 ‘육아는 남편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어 왔다. 정말 예전에 비해서는 아빠의 육아 참여 필요성에 대해 사회적으로 많은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잘 보면 주변에서 육아휴직중인 아빠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고, 아빠 예능 프로그램은 이제 인기를 넘어 식상해질 지경이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맞닥뜨린 현실육아의 가장 큰 반전 중 하나가 바로 '아빠'의 역할인 것이. 나는 막연히 그리고 너무나 당연히, 아기를 낳는 건 나지만 키우는 건 남편과 내가 꽤 동등하게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초반에는 내가 육아휴직을 쓰기 때문에 6:4 혹은 7:3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아, 출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뭐? 남편이 안 도와줘?
물론 도와준다. 얼마나 도와주냐면, 본인이 집에 있을 때 종종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고 동화책을 읽어주며, 주말이면 아기와 함께 외출을 하고 목욕도 시켜준다. 내가 마사지나 네일케어를 받으러 간다고 하면 그 동안 아기를 혼자 본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이지만 아기가 나오고부터는 업무 외의 개인적인 약속을 거의 잡지 않는다. 일주일에 평균 2~3일 정도는 일찍 퇴근해 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야근이나 모임이 있는 날도 거의 자정 전에는 들어온다. 심지어 출산 후에 그는 조금 더 시간적 여유가 있는 회사로 이직하기까지 했다. 남편은 현재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을 것이고, 주변 다른 남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에도 이 정도면 가족과 많이 함께하는 편에 속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는 남편의 육아 분담률은 글쎄, 한 10%정도 되려나. 이것은 감히 '함께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미약한 수준이 아닌가. '도와준다'는 표현이 훨씬 적합하다. 하루에 아기가 아빠를 보는 시간은 길어야 아침에 출근하기 전 1시간 반 정도 되려나. 그나마도 그의 출근시간이 10시까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남편이 아무리 칼퇴를 해도 집에 돌아오면 8시이고, 그 때는 이미 아기가 꿈나라로 간 후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회사를 다니는 이상 이 이상의 육아 참여는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온종일 아기를 재우고 먹이고 달래고 놀아주는 지리한 과정을 혼자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편이 더 함께 해 주면 좋겠다는 바램이 든다. 그러나 요즈음 그를 보고 있자면 어째 안쓰러워지는거다. 평소처럼 늦게 잠들어 평소보다 두어 시간 일찍 일어나서 아기를 보는 것은 그가 기운이 넘쳐서가 아니라 지금 안 보면 하루종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본인은 씻지도 않고 아기에게 계속 예쁜짓을 시키며 놀다가 늦었다며 허겁지겁 옷만 걸치고 나가는 뒷모습을 본 것이 몇 번인지. 나에게는 그저 일상처럼 느껴지는 아기의 웃음조차 남편은 '빨리 와서 이것 좀 보라'며 몹시 귀여워했고, 나는 이미 수십 번 본 아기의 재롱을 보고 감격하곤 했다. 소율이 이제는 더 이상 재미있어하지 않는 놀이를 남편이 계속 시도할 때는 왠지 서글퍼져서 일부러 나도 아기의 그런 모습 처음 보는 척을 하기도 했다. 소율이 아빠를 보며 웃고 아빠빠빠 부를 때 세상을 가진 것 같은 표정이다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울먹이며 엄마를 찾을 때 그의 얼굴에는 서운함과 함께 쓸쓸함이 드리운다. 그마저도 요즘엔 아기가 엄마와 가까운 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변해 간다. 내가 아이를 키우느라 희생한 경제활동은 육아휴직 제도로 보완되고 여성 경력단절 문제 등으로 사회적으로 공감해주기라도 하는데, 그가 경제활동을 하느라 희생한 아이와의 시간은 무엇이 메꿔줄 수 있을까? 휴대폰 카메라가?
남편은 나를 돌봐준다
이러니 어차피 애도 못 볼 거 돈이라도 제대로 버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야근하며 살았겠다며 앞 세대의 아버지들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실질적으로 내가 육아의 삶을 견뎌내는 데에는 크게 도움을 준다. ‘아기보기’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는 주양육자인 나의 일을 조금 도와주는 수준이지만, 그가 일찍 퇴근해서 하루종일 거의 굶은 나랑 밥을 먹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오늘 아기와 있었던 정말 사소한 일들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젖병 설겆이 등의 작은 가사노동을 거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만큼 건강한 멘탈로 아기를 키울 수 있었을까? 사실은 그런 사소함이 나를 견디게 한다. 남편의 커다란 역할은 육아에 지친 나를 달래주고 나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것이다. (물론 더 큰 역할은 돈을 버는 것..) 애는 내가 보지만 나를 돌보는 건 남편인 이 시스템에서 가중치를 따지면 어쩌면 육아는 ‘함께한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아기 돌보기는 정말 힘들다. 맨날 하는 사람은 지겨워서 힘들지만 가끔 하는 사람은 난이도가 높아서 힘들다. 나에겐 너무 쉽고 당연한 것들이 그에겐 낯설고 어려운 것들이다. 그 막막함을 매번 이겨내고 아기를 보는 남편에게 고맙다. 앞으로도 긴 레이스, 우리 건강하게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