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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 Sep 05. 2024

자벌레

자연채집

페인팅 작업을 위해 채집한 식물들을 책상 위에 펼쳐놓는다.

시들기 전에 빠르게 물꽃이를 해두고 작업할 잎들을 분리해 놓느라 손이 바빠진다.

원단위에 물감이 새겨지고 붓으로 섬세하게 집중할 때, 하얀 원단위에 작은 벌레가 기어간다. 자벌레다.

자벌레는 자나방의 애벌레다. 기어가는 자벌레는 건드리면 꼼짝 안 하고 서있는데 그 모습은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변신술을 가지고 있다.  

    

몸을 기억자로 구부리고 펴고 구부리고 펴며 내가 그린 나뭇잎 위로 기어간다.

채집하던 나뭇잎에 붙은 자벌레와 노린재, 무당벌레, 송충이들이 가끔 따라온다.

처음엔 깜짝 놀라다가 이제는 책상 위에서 돌아다녀도 그냥 둔다.

숲에 있다가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놀랐을 벌레들에게 내가 오히려 미안해할 일이다.


1cm도 안 되는 갓 부화한 아주 작은 자벌레도 어른자벌레와 같이 기어가는 모습에서도 생명의 힘이 느껴진다. 앞으로 앞으로 기어가는 자벌레는 자기 몸의 길이만큼 한 뼘씩 이동하니 걸음걸이는 빠르다.  

송충이처럼 털도 없고 마치 나뭇가지가 구부러지며 꽃꽃 하게 기어가는 모습은 단연 엽기적이긴 하다.   

   

나를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서 놀라고, 나뭇잎으로 들어 올려 이거나 먹고 있으라고 한쪽으로 옮겨준다.

싱싱한 나뭇잎을 먹고 자라서인지 투명하고 깨끗한 자벌레의 연둣빛이 곱다.

서로 말은 나눌 수 없어 뭐라 중얼거릴 수도 없지만, 이따가 일 끝나고 다시 숲에 데려다주겠다고 일러준다.

식물채집 중 잎에 붙어 온 곤충들과 지내는 일도 익숙해졌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 작업실 문을 니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다. 아마 부화직전인 애벌레가 온 게 아닐까.

나비는 층고가 높은 작업실 꼭대기까지 날아다닌다. 나비가 되어 마주하는 첫 세상이 초록숲이 아닌 것에 놀랬을 터, 창문을 열어 밖으로 날아가라고 재촉한다.      


작업실에 둔 파키라에 물을 주려 가보니 잎이 듬성듬성 구멍이 나있다. 애벌레가 먹는 흔적이었다.

작은 하트모양의 구멍을 여러 군데 내어가며 이파리에 그림을 그려놓았다.

책상에서 언제 화분까지 기어가서는 잎들을 먹었는지. 거리를 보니 작은 몸짓으로 밤새 얼마나 헤매며 기어갔을지 생각하니 대견했다. 입맛에 맞는 식물이 있어 애벌레를 배불리 먹일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잎에 상처 하나 없이 화분에서만 고상하게 자라던 파키라는 애벌레가 등장하자 야생의 식물처럼 수난을 맞았다. 식물은 혼자 있는 것보다는 찾아와 주는 곤충이 있을 때 생명력이 살아난다.  

평온하던 작업실은 애벌레의 방문으로 식물들도 나도 덕분에 생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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