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양면 : 비 진정한 슬픔이라는 촉매
책을 험하게 보는 편이다. 마음에 드는 부분에 마킹 테이프를 붙이기보다는 쓱 접어버리는 편이고 누워서 보고자 책의 한 쪽면을 둥글게 말아 한 손에 쥔다. 비상식량처럼 가지고 다니는 책들은 가방 속에서 뒹굴거리다 모서리가 닳아 금세 나이가 들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좀처럼 문장에 밑줄을 긋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귀한 문장을 수첩에 옮겨 적을 때에도 책에는 밑 줄은 치지 않는다. 나름의 이유도 있다. 좋아하는 페이지를 툭 접어두었을 때는 나중에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기 위해 한 페이지를 통째로 다시 읽어야 하고 그러한 사소한 정성이 문장을 위해 매번 마땅하게 여겨진다. 문장에 밑줄을 그어두면 단 번에 한 문장에만 시선이 모여 문맥을 다시 볼 일이 없어지더라. 안 그래도 문장 편애가인 내게 그 행위는 너무나 책을 다시 안 읽게 했다.
아침에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 87페이지의 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문맥은 이러했다. 글쓰기 수업 중 한 학인이 과제로 써 온 글을 낭송하는 동안 어떤 문장에 다다르자 원고를 보며 듣고 있던 학인들이 일제히 그 문장에 스윽 밑줄을 그었다는 것이다. 그 문장은 이러하다.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이 문장을 읽고서 한동안 뒷 줄을 읽지 못했다. 나는 학인들을 따라 그 문장에 천천히 밑 줄을 그었다.
제작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음악 모임에 참석한다. 혼자서 전 곡을 다 듣기는 좀처럼 어렵지만 명실상부 명곡인 클래식 음악 한 곡을 선정하여 일 년간 달마다 다른 연주자의 버전으로 모여듣는 모임이다. 올 해의 음악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다. 그 음악은 어찌나 슬픈지 듣는 시간 내내 상상이 잿빛이다. 정말로 슬픈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지만 대부분은 슬픈 감정만 느끼고 마는데 그래서인지 모임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마시면 꼭 애매한 온도의 물로 목욕하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미한 개운함과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싶은 열망이 뒤섞인다. 나는 그런 감정을 비 진정한 슬픔이라고 부른다. 음악모임을 마친 후에는 주로 술을 마시러 가서 일기를 쓴다. 그렇지 않으면 안 쓸 일기를 쓰게 만드는 좋은 촉매가 된다.
진정한 슬픔은 누구나를 얇게 만들지만 비 진정한 슬픔은 묵직한 촉매를 만든다. 그 안에서 발휘되는 것은 이를테면 쓰고 싶은 기분, 고유함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의외의 아무를 찾고 싶지 않고 혼자여도 외롭지가 않은 비장함이다. 비 진정한 슬픔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문장을 읽고서 나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슬픔이 떠올라 울었다. 진정한 슬픔이었다. 하지만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슬픔이 더 많다는 것을 써 눌러 남기고 싶어졌다. 수첩에 한 문장을 덧붙여 썼다. "비 진정한 슬픔을 차지할 수 있다면, 내게는 이야기할 수 있는 슬픔이 더 많다." 비 진정한 슬픔은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슬픔을 기꺼이 이야기하게 해주는 친절한 문지기 같다. 내가 눈물을 닦고 짧은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도록 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선물처럼 완성된 개운함이 찾아온다. 오늘 하루는 이걸로 된 것 같은 말끔한 기분이 든다. 수첩에 적힌 슬픔의 양면을 본다. 양 쪽 모두에 있는 집중성에 대해 생각한다. 나이가 많이 들어도 기꺼이 슬퍼할 수 있는 노인으로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