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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Apr 12. 2022

홍고추를 산다는 것

 삼월은 쏜 화살처럼 날라가 사월에 박혔습니다. 이유가 어려운 우울감에 책도 공책도 보지 못하고 엎드려 봄바람을 피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챙겨서 붙잡은 것은 ‘직접 요리하는 일’이었는데요. 하루 한 끼는 좋은 재료로 요리해서 먹자는 식이었어요. 5년 전 판교로 출퇴근을 할 때에 잡은 습관입니다. 자존감이 발 밑으로 숨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제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아찔한 세월을 보내는 중이었어요.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끝없이 고민하던 시절. 그때 제가 잡은 지푸라기가 바로 채소 먹기인데요. 완성되어 배송되는 샐러드가 아닌 직접 요리한 채소를 매일 먹는 것이었어요. 판교까지 출근 시간은 10시. 9시에 집에서 나서야 하니 7:30분에 일어나서 냉장고에 있는 채소를 대충 씻고 썰고 볶고 담고 집을 나서는 일과를 악착처럼 지켰습니다. 도움이 된 것은 동료들의 응원이었어요. “잔디씨는 정말 대단해요.” “정말 부지런하세요.” “저도 해봐야겠어요.” 같은 한마디 말들이 겹쳐져 저를 백만돌이로 만드는 건전지가 되었고 그렇게 말이 가진 힘으로 제 자신을 지탱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울하다고 느껴질 때면 자꾸만 누워있게 돼요. 오늘은 아무것도 못 한다고 억지로 외치면서요. 요리를 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집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에는 당연하게 별별 채소가 다 있고 레시피를 물어보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좔좔 대답해주시는 사장님들도 많아요. 반숙 계란장을 만드려고 재료를 척척 사다가 홍고추에서 마음길이 멈춰 섰습니다. 홍고추. 단 한 개만 필요한 홍고추. 어디에도 한 개만 팔지는 않고 기본이 열 개들이인 홍고추. 열 개의 홍고추를 적어도 몇 주 안에 다 쓸 수 있을 것인가. 멈칫할만했어요. 모두의 엄마처럼 보이는 채소가게 사장님께 “사장님, 홍고추는 어디에 넣어먹어요?” 하고 물었더니 사장님은 “홍고추 어디다가 넣어도 다 되죠.” 하고는 은근히 한 봉지를 손에 들려주셨어요. 그렇게 열 개들이 홍고추를 샀습니다. 어디에 넣어도 괜찮은 아홉 개의 홍고추는 아직 어디에도 못 들어가고 냉장고에 있지만 그래도 좋아요.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으면 기분 좋고, 어디에 넣어도 괜찮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도 누군가 “어쩜 홍고추를 다 샀어요?” “홍고추를 소지한 자취생이라니.” 하고 말해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아마 더 기운이 날지도, 나머지 아홉 개도 어딘가 착착 썰려 부지런히 들어가 있을지도요.


+ 홍고추 열 개를 삼천오백 원에 샀고, 홍고추를 버리지 않기 위한 채소 밀폐용기를 삼만 팔천 원에 샀습니다. 홍고추는 얼마일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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