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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Aug 24. 2023

내가 사랑하는 것들

1. 나의 빵 사랑


 요 며칠 빵을 사 먹었다. 집 앞에 있는 근사한 파티세리에서 세계 최고의 밤파이를 판다. 파삭한 페스츄리 속에 (직접 삶은) 달콤한 밤 앙금이 들어있다. 가끔씩 작은 밤알갱이가 씹히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을 바꿔버리는, 이 무섭게 맛있는 빵을 오랜만에 다시 맛보면서 문득 '내가 요즘 빵을 잘 안 먹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빵순이 신잔디가 빵을 안 먹는 건, 홍시맛이 나는데 홍시는 안 들어있는 것과 같다. 아무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빵을 너무 좋아하지만 맛있는 빵은 너무 비싸서 집에서 직접 구워 먹을 정도다. 집에서 구웠던 빵은 무려 48시간 발효를 요하는 '치아바타'나 '포카치아', 속에 잘 풀어진 계란과 시금치를 채우고 구워내 브뤡퍼스트로 즐기기 좋은 '키슈'처럼 주로 식사로 먹는 빵들부터(끝난 줄 알았지?) 이따금 어린이들을 위해 설탕 대신 스테비아를 넣어 당근케이크를 굽기도 하고, 오렌지가 듬뿍 들어간 상큼한 파운드케이크를 굽기도 했다. 그뿐이랴? 이웃집 임선자 할머니를 위해 미숫가루로 초콜릿 쿠키를 구워보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유나가 가장 좋아하는 바스크 치즈 케이크는 아예 눈을 감고도 구웠다.

 이렇듯 방대한 나의 빵사랑이 언제부터 식어갔었나, 되짚어보니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인 것 같다.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결심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무력감이 고장 난 시소처럼 덜렁거리는 혼자의 삶은, 잘 차린 채소밥상 아니면 사발면으로 진행됐다.(요즘 진행시켜에 빠져있는 중) 이 와중에 빵이 외면받은 셈인데, 그럴 수는 없다. 이제부터 빵을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크림빵을 사 먹었다.


2. 그들의 문장


 윤성희 작가의 <상냥한 사람>이라는 장편소설에 나오는 한 문장은 이렇다.

‘강차장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은 많이 보았지만, 누군가에게 아무 영향도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처음 본 것이다. 나는 스토리에 몰입되어 쭉쭉 달려 나가다가 그 문장에 한동안 눈길이 멈추었다. 책상으로 다가가 색연필을 꺼내 밑줄을 그었다. 소설이 끝나고 작가의 말에 ‘작가는 어느 정도의 슬픔이 적절한지, 또 어느 정도의 희망이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일까?…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서 나는 무서웠다.’라는 문장이 있다. 내가 본 어느 소설보다 ‘슬프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 작품이지만, 나는 이 작품이 슬픔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상냥한 사람>에서 가장 상냥한 사람은 바로 윤성희 작가인 것 같다.


 정애성 학자의 유고산문집 <소피아의 방>을 읽고 있다. 그녀의 신랄한 문장과 유머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가슴이 뻥 뚫리기도 하는가 하면 배려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통감하는 시간도 가져진다. 한 에피소드 중 정호승 시인의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시를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 나는 이 시를 여기서 처음 보았다. 정애성 학자는 이 시를 부르며 산을 올랐다고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아서 참 좋았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시어로 노래를 부르며 산을 오르는 용감하고 따뜻한 이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조용하게 소리 내어 시를 불러본다. 함께 오르는 모습도 상상해 보면서.


 김현경 학자의 <사람, 장소, 환대>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정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을 준다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학자의 논리어로써 우정의 관념에 대해 서술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어떤 문장은 맥락을 뛰어넘어 마음에 남는다. 윤성희 작가의 표현처럼, 나는 이 말을 오래도록 호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게 될 것 같다. 



3. 최상급 표현, 순간주의자


 나는 최상급 표현을 남발하기를 좋아한다. 요컨대 모 선생님께서 양념하여 구운 두부와 맛있는 장아찌를 넣어 김밥을 말아주시면 나는 ‘평생 이것만 먹고살고 싶습니다. 사람은 이런 걸 먹고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한다. 그 밖에도 ‘이렇게 맛있는 건 태어나서 처음 먹어봅니다’, ‘그냥 저라는 한 사람의 인생에게 최고를 주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등등 갖은 최상급 표현을 붙인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진심이다. 말하자면, 나는 순간을 인생으로 생각하는 ‘순간주의자’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그 순간만 사는 나에게는 그 순간의 최고가 인생 최고인 것이다. 사랑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심사숙고 고민하여 내뱉지 않는다. 나에게 사랑은 약속이나 책임이 아닌 감정이다. 나는 자주 ‘사랑합니다 선생님!’ 하고 소리친다. 보고 싶은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땐 ‘사랑하는 민지언니께’라고 적는다. 연인을 떠올릴 때 행복감이 들면, 나에게는 그것이 곧 사랑이며, 사랑한다는 말은 현상이다. 나의 사랑에는 고민이 없다. 다만, 순간이 있을 뿐. 그런 나를 보며, '또 저런다 또 하하하' 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나는 정말로 좋다.


4. 노래를 만드는 일


 제9회 윤동주 음악제에 지원했다. 공모전에 음악을 내는 일은 처음이다. 얼마 전 싱어송라이터 허정혁의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보다가 윤동주 시인의 시로 지은 노래를 들었고, 그것을 계기로 윤동주 평전과 시집을 샀다. 내가 아는 윤동주는 부끄럽게도 영화 ‘동주’ 속 윤동주뿐이었기 때문이다. 평전을 읽는 것은 결국 포기했지만, 인터넷 검색과 시인이 살았던 시대를 사유하며 시집을 읽었다. 그중 ‘가슴’이라는 시가 와닿아 그 시로 노래를 만들어 보냈다. 지원 메일에는 ‘선정의 여부와 관계없이 시인이 살았던 시대를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다’는 말을 적었다. 1월이나 2월 중 발매할 계획이다.(입상은 기대하지 않고 있음)

 새로운 EP앨범 녹음을 차일피일 미룬 건 불면증 때문이 7할이라면 3할은 자신이 없어서다. 내가 나를 등 떠미는 조바심으로 덜컥 녹음일정을 잡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만들었으니 내자.’가 아니라, ‘때가 되었다.’는 느낌을 더 기다리는 것 같다. 다만 잠자코 곡을 쌓아갈 생각이다. 때가 올 때까지.


5.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


 이유 없이 불안하고 마음이 복잡할 때면 잔뜩 날이 선다. 악몽에 시달리고 나면 소리 내 울고만 싶다. 꿈은 누구도 탓할 수 없기에 속에서 화가 난다. 꼭 그럴 때, 마침 꼭 그럴 때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날 선 나를 물렁하게 녹여준다. '잘 다려진 손수건'으로 눈물도 화도 닦아준다. ‘잔디씨, 오늘은 좀 어때요?’ 하는 그 한 마디가 오늘 나를 물렁한 사람으로 살게 해 준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 무덥고 지치지만, 아름답고 감사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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