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조금 아픈 이야기
나는 초, 중, 고 모두 전학생으로 살았다. 내가 살아온 동네는 서울, 여천(이제는 여수), 대전, 수원, 이천, 서울로 서울특별시 은평구부터 시작하여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온 셈이다. 사 남매 중 둘째인 나는 누구든 하나는 맡아야 하는 '학년 걸치기'를 맡게 되었다. 오빠나 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새로운 도시에서 시작하는 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전학생이 되어야 하는 식이다. 전학생인 나는 이름도 신잔디 인지라 학교에서 늘 주목을 받았다. 나의 학창 시절엔 주로 여자아이가 첫 번호, 남자아이가 그다음 번호, 전학생은 맨 끝 번호였다. 체력장을 하거나 운동장 조회를 하는 등 번호대로 줄을 서야 할 때 늘 맨 끝자리였고 아이들의 관심과 무관심을 동시에 받았다. 친한 친구가 생길만하면 이사 계획이 생겼고 단짝친구를 사귀는 일이 어려워졌다. 결국 은따(은근히 왕따)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학교에서 친구 만들기 어렵기로는 사 남매 모두 마찬가지였으므로 우리는 똘똘 뭉쳐 주로 노래방을 다녔다. 개다가 당시 오빠의 꿈은 가수였다. 오빠 노래에 맞추어 화음을 넣어주면 오빠가 좋아했다. 당연하듯 마이크 쟁탈전은 치열했는데, 그런 사정을 아셨는지 서비스 한 시간은 기본으로 넣어주던 노래방 사장님은 꼬꼬마인 막내가 마이크를 잡을 때만큼은 조용하던 우리를 칭찬해 주셨다.
전학생에 아싸인데도 나는 학교에서 노래할 기회가 생기면 주저 없이 앞으로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는 장난기가 많아 ‘은따'인 나의 사회적 위치 따위는 고려도 하지 않으시고 이따금 종례 전에 갑자기 나를 단상 앞으로 불러 세워 노래를 한 곡 하라고 시켰다. 아이들은 나를 ‘친구’로 끼워주지 않으면서도 노래에 대해 비아냥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더 열심히 노래방에 다녔다.
당시 ‘버디버디’라는 채팅 프로그램이 유행할 시절이었다. 버디버디 덕분에 계영이라는 친구가 생겼다. 계영이는 아이돌 밴드의 시초인 클릭비 팬이었다. 나는 H.O.T를 좋아했지만, 클릭비를 좋아하는 계영이를 적극 존중해 주었다. 우리는 같은 반이 아니어서 버디버디로 오빠들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일진인 대다 준수한 얼굴로 특히 인기가 많던 남학생에게 버디버디 쪽지가 왔다. 갑자기 나한테 사귀자는 거다! 나는 깜짝놀라 속으로 ‘네가 왜 나를…? 나는 아싸인데…’하고 생각했다. 나는 네가 누군지도 잘 모르니 그건 안된다고 했다.(당근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를 모르는 학생은 우리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그랬더니, 다음날 그가 우리 반을 찾아왔다. 아이들이 토끼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나에게 교환일기를 써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마음이 통하면 사귀고 아니면 사귀지 말자고 했다. 아이들은 너무 놀라서 ‘어우~’하는 그런 리액션조차 없었다. 그날로 우리는 보름 정도 교환일기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그가 일진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하는 행동들이 영 무서웠다. 휴대폰이 없던 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공중전화로 가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한테 들키기 싫었나)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나는 곧 이사를 간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나름의 킹카였던 그를 좋아하는 일진 여자아이들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안경 낀 새까만 전학생이, 공부도 못하고 메이커 운동화도 신지 않고 급식도 혼자 먹는 은따가 감히 우리 학교 킹카를 간보다니! 일진들은 나를 찾아와서 내게 앞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알겠다고 했다. 앞으로 선생님이 노래를 시켜도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알겠다고 했다. 나는 다 알겠다고 했는데도 아이들은 괴상한 방식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건 바로 내 뒤를 따라오면서 나의 종아리에 침 뱉기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명중한 아이들은 까르르하며 좋아했고, 미처 맞추지 못한 아이는 아쉬워하며 이따가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내 종아리에 떨어지는 그들의 침을 느낄 수 있었고 보란 듯 나를 조롱하는 그들의 말들도 모두 들었지만, 모른 척 계속 길을 걸었다. 화장실에 가서 양말을 벗고 종아리를 씻어냈다. 하굣길에도 아이들은 나를 따라다니며 내 종아리에 침을 뱉었다. 그러다가 일진들 사이에 그 유행이 번지게 되면서, 남자 일진 아이들도 나를 따라오며 '신잔디 종아리에 침 뱉기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다행인지 뭔지 몰라도 그는 이 무리에서 빠졌다.) 나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는 일이 너무 바빴고 싸우기도 너무 바빴다. 오빠는 고등학생이 되어 점점 노래방에 다닐 시간이 없어졌다. 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유일한 친구 계영이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창피했다. 고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가장 먼 학교로 가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는 학교였다. 내 종아리는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상처 투성이다. 종아리가 가려운 것 같은 기분은 아마도 죽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길에서 침을 뱉는 사람을 보면 침 뱉음을 당하는 땅의 기분을 생각하게 된다. 한 번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땅에 침을 뱉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너무나 슬퍼서 울컥했다.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땅에게 침을 뱉을까? 땅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도시의 땅에는 말라붙은 사람들의 침이 있다. 흙에 뱉는 침과 콘크리트에 뱉는 침은 흔적이 남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어둑한 곳에 함께 모여 땅에 침을 마구 뱉는 사람들을 보자면, 언젠가 시골로 떠나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보는 내내 힘들었지만 꼭 필요한 영화인 '한공주'라는 영화에 이러한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