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껍질을 씹듯이
나의 일과와 일상성의 의식을, 그리고 뒤덮고 있는 흐린 불투명한 안개를 오렌지 껍질을 씹듯이 씹어서 한 번이라도 놀라게 하고 싶다.
1964. 1. 15
전혜린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언젠가 ‘사고 많은 삶으로 살고 싶어라!’ 하고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이따금 불쑥불쑥 올라오는 나의 집시에 대한 동경감은 그 감이 올라올 때면 좀처럼 잠재울 수가 없다. [집시] :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네이버 사전 용어가 내가 바라는 딱 그것인 것이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싶은 건 아니고 다만 ‘방랑’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자유’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그것은 혼란의 느낌이기보다는 기묘하리 만큼 행복의 느낌에 가깝다. 나에게는.
나는 오늘 여기에 있을 수도, 내일 저기에 있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의 한결성은 어딘가에 유지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늘 다른 사람도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잃지 않고 싶달까, 다양한 곳에 있으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 결과로 다양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생을 마감하기 전 날, 회상할 거리가 수도 없이 많아서 미쳐 놓쳐버리는 것들이 있었으면 싶다.
요즘에는 그것이 문학으로 해결되고 있다. 요즘이야 말로, 소설에 푹 빠져 사는 시기다. 소설을 완독 하면(반드시 완독 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다른 세상에 다녀온 느낌이 여실하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되어본 느낌도. 그런 면에서 소설은 가장 저렴한 값으로 몇 번이고 떠날 수 있는 환상의 여행지와 같다. 최근 읽은 단편소설 중 한 인물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스스로 진단할 일이 있었다. 내가 문제인가. 나는 왜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주변인에게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다녔다. 다시 읽고 또 읽고 분석하며 읽어보면서 드디어 그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공감이 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어도, 그래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 경험은 나를 소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했다. 하루에도 몇 명의 캐릭터를 만나면서, 서로 다른 장소에 서서 나는 방랑자가 된다. 내 멋대로 그들을 관찰하며 영감을 찾아내어 본다.
다른 사람 인생을 마음껏 훔쳐보고 나면 그것이 너무 재미가 있는 나머지, 사는데 지쳤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삶이 불투명하게 느껴질 때 소설을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이왕이면 국내소설을. 어쩌면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오렌지 껍질을 씹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