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계 이야기
“당신은 몰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 당하는 기분이 얼마나 슬프고 비통한지를.”
“음? 갑자기 왜……. 설마 몰랑이씨가 레인님께 거절 당했습니까?”
“한 번은 그랬지. 아니, 한 번이 아니었다.”
땡땡이님은 콧등을 흠, 하고 매만지더니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레인님은 중세 때부터의 거의 모든 편지를 다 보관하고 있어. 난 기억력이 좋아서 한 번 본 건 잊지 않는 편이야. 처음 편지는 어땠더라, 그래. 그랬어.”
정말 말도 안되게 프라이버시 침해를 하는 땡땡이님이지만, 딸기님은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들었다.
「To. 경외하는 나의 아름다운 아이베르 공녀님께
공녀님! 안녕하세요. 저는 아르웬 피커이라고 합니다. 그냥 저를 몰랑이라고 불러주세요. 오웬 기사님의 밑에서 일하는 중급 종자인데, 사람들은 다들 저를 이렇게 부르곤 하거든요. 그것보다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요……. 그냥 궁금했어요. 왜 공녀님은 항상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드나드는 탑 그것도 1층 창문 앞에 앉아서 비를 구경하시는 거죠? 구경하시려면 더 좋은 장소들이 많잖아요.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언제나 보면서 갸웃거리게 되었어요. 공녀님은 분명 비를 좋아하시는 거죠? 늘 그럴 때마다 창가에 가 계시더라고요. 아, 장미는 늘 마을의 유명 꽃집인 베르베르에서 사 오고 있어요. 정말이지 행복한 것 같아요. 붉은 장미는 열정적인 사랑의 상징이라죠?
전 사실 아직 어려서 그런 감정은 잘 몰라요. 하지만 몰몰랑- 아, 이게 입버릇이라 다들 몰랑이라고 불러요. 제게 사랑의 감정이라는 게 있긴 하다면, 태어나서 본 가장 멋진 공녀님께 바치고 싶어요. 전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하는 소리를 듣지만, 어쩌겠어요?
몰몰랑- 세간에서는 공녀님을 가문에서 숨겨 키우는 셋째 고명딸이라 이름도 안 알려준다고 해요. 그러니 제가 그냥 에이베르님이라고 할게요. 괜찮을까요? 늘 같은 편지를 써서 장미와 함께 하녀님들께 보내는데도 닿지를 않네요. 그냥 아이의 치기라고 봐주세요. 위대한 에이베르 가문에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치사량의 행복이거든요. 감사합니다, 돌봐주셔서. 오갈데 없는 저를 여기 있을 수 있게 해주셔서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공녀님.
From. 몰랑이가」
하녀들은 아르웬이 편지와 함께 장미를 건네면 키득거리며 오늘도야? 하고는 편지를 읽어봤다. 내용은 조금 달라졌지만 비슷비슷해서, 답장이 안 올 텐데도 기특하게 하고는 그것을 몰래 전달할 방법을 여럿이서 모색했다. 윗사람들에게 걸리면 분명 고얀 것들, 이라는 눈빛이 돌아올텐데도, 그녀들은 당장의 밥줄보다 이 아이의 마음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모르겠다.
다들 어느 순간부터 그러고 있었다.
베르베르는 그쯤에서 다들 말렸어야 옮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우습게도, 시녀들의 선을 넘어 공녀에게 그 편지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언제나처럼 제게서 사가던 장미도 함께 전달되었다.
돌아온 답변은 이러했다.
「To. 몰랑이
편지를 보았도다. 너는 아직 정말로 겁이 없는 아이구나. 나의 책상에 대자로 편지를 펴놓는 간 큰 짓을 하다니. 분명 이걸 전해준 누군가가 있을 터. 내 그 이를 잡아 잘못을 고하고 벌할 수도 있을 것이나……. 궁금하다. 나 에이베르 가문의 셋째는 너 아르웬 피커에 대해 알고 싶다. 그런 고로 내 비밀 아지트를 소개하겠다.
저택 내의 도서관의 서쪽 J칸 벽에 기대어라. 그러면 문이 열리며, 너와 나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허튼 마음을 품었다면 난 널 죽여버릴 것이다. 에이베르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는 감히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P.S: 비는 몹시 좋아한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너 또한 그것을 알게 해주마. 내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으니 난 나 자신을 레인이라 칭하겠노라.
From. 레인」
베르베르는 여기까지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 화상아! 또는 들켜서 목이 잘리는 거 아니니? 아이야, 그만 두렴! 같은 소리를 하며 만류도 해봤다. 그러나 아르웬은 예전부터 똥고집이 대단해서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짓고는 몰몰랑- 도서관으로 갈래요- 하고는 자취를 감췄다.
원래 그런 쪽지는 불태워야 한단다.
얼마 안되는 충고를 남겨 베르베르는 그 편지를 아궁이에 직접 불태워주는 사이까지 되곤 했다. 아무튼 간에 아르웬은 어느날 저택 도서관에 오웬의 이름을 대고는 출입했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기사의 종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사실 얼마나 있겠는가. 그는 저택 내의 모든 곳을 작은 키를 이용해 엉금엉금 기었다. 인형 의태도 풀고 도서관에 침입해 J열까지 가 기대자, 아뿔싸! 진짜로 등이 스르륵- 밀리다 갑자기 발 한구석이 꺼지며 어딘가로 추락했다.
으아악!
비명이 일어나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쯤, 눈앞에 하늘색 긴 머리의 소녀가 멍하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인님이었다.
여기까지 읊은 땡땡이님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충 여기까지만 봐도 어떻게 만난지 알 거다. 두 사람은 운명이었다. 불꽃 같이 타오르는 사랑이 너희들이었다면, 이 두 사람은 물과 같은 잔잔한 사랑이었다. 몰랑이씨는 모두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 레인님을 다시 한 번 인간으로서 만나고 자신이 행한 죄업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 인간이 되기로 한 거다, 땡.”
“좀 쉽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나요?”
“그럴 수는 없다, 땡. 난 너희 부부에게 질려버렸다, 땡!”
땡! 하는 부분이 은근 귀엽다는 걸 자신은 모르리라. 딸기는 한숨을 쉬고는 그러면 몰랑이의 죄업은 도대체 어떤 거길래 그러냐고 캐내었다.
“몰랑이씨의 죄업? 그건 너희 알아서 찾아라.”
“하지만 그 분은 누군가에게 한 차례 살해당하고, 한 번 누군가에게 복수했다고 했잖아요. 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왜죠? 도대체 누구에게 살해당했길래 그런 결말을 맞은 거죠? 누구도 몰랑이씨가 일주일 전쯤에 죽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요!”
“귀찮으니 힌트 하나쯤은 주마. 기사 오웬이다, 땡.”
“오웬?”
“몰랑이씨는 기사 오웬씨에게 한 번 죽었다, 땡.”
댕-
댕-
뻐꾹!
고요한 교도소 사무실 안에 3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지금, 뭐요? 딸기님의 머릿속이 하얘지는 소리가 들렸다.
땡땡이님은 더 가르쳐주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합해봤을 때,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들켰을 경우 오웬이 자신의 종자를 죽이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죽인 걸까? 중세 시대에도 인형 살해는 중죄로 여겨지고 있었다. 심지어 거대곤충이라 할 수 있는 동충을 잡는 일도 왕의 허락이 필요하곤 했다.
아, 설마 죽인다는 말이 중의적인 표현은 아닐까?
딸기님은 거기까지 읽어내고는 곧바로 땡땡이님에게 직구를 꽂아넣었다.
“진짜로 죽은 게, 아니죠?”
그러자 땡땡이님이 답했다.
“……머리가 쓸만하군요, 지성의 신님.”
“복수도 철저하십니다.”
“아무튼 거기까지 얘기하도록 하지요.”
“레인님은 이걸 아십니까?”
“아니요. 만약 알고 계셨더라면……그녀는 오웬과 그와 관련된 모든 후손들을 죽였을 겁니다.”
과연. 그럴 법 하다.
딸기님은 몰랑이씨의 트라우마가 상당한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술과 음악의 신 생활을 해오면서도, 그는 이미 죄의식이나 부담감이 한계였던 게 아닐까? 그래서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겠다는 강박감에 시달린 것 아닐까?
하지만, 그 마음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딸기님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땡땡이님에게 고마워서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쩔 수 없는 입장 차에 허리만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인형으로 의태했다.
“딸기, 언젠가 이 은혜는 갚겠다, 딸기!”
“그냥 가십시오, 땡!”
탁!
닫히는 문소리가 제법 매서웠다. 그녀는 키득키득 웃고는 몇 걸음 걷다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화장실로 급히 걸어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몰몰랑- 나는 딸기님도 제법 좋아해」
「어휴, 난 쟤 싫어요! 내 남편이니까 내 편 해줘요!」
「딸기, 좋아한다잖아요, 딸기~」
「으, 느끼해!」
그렇게 사람 좋았던 사람을.
「몰몰랑, 몰랑이는 사람 안 죽였어…….」
「아르웬, 잠깐만.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몰랑, 오웬이 날 죽였어, 몰랑.」
「피커? 너 지금 눈에서 피가 나. 울지 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모든 인형이 바라는 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사라지게 할 수 있어.
‘그건 영혼이나 마찬가지인 인형의 별을 한 번 죽였다는 거잖아.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몰라도 이건, 레인님이 알면 피바람이 불어닥칠 게 분명해.’
딸기님의 사고가 끊겼다. 여자 화장실 문을 잠가 놓은 다음으로부터는 그냥 울었다. 엉엉 소리를 내며 내리 울었다. 모두가 사랑하던 몰랑이가 가버렸다. 아무도 이유를 모른 채.
“호오~박!”
쾅.
좋은 아침이다! 그리 생각한 호박씨는 이미 텅 빈 침대를 보고는 속옷과 겉옷을 챙겨입고는 어기적어기적 부엌으로 갔다. 음, 어제는 뜨거웠다. 그는 베시시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짓다가 앗, 그래도 이러면 안 돼! 하고는 온갖 잔망을 떨면서 토스트를 굽기 시작했다.
오늘은 꼭 누구에게 가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느긋이 어제 귀요미와의 인터뷰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정리하고 나가볼까 했다. 그래서 그는 아침 식사로 베이컨 몇 조각과, 달걀 프라이를 해 먹고는 책상 앞에 앉아 정보를 정리했다.
일단, 귀요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중세 때부터 살았던 인형이긴 하다. 고대까지 가면 정말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일단 딸기님과 호박씨는 고대부터 산 얼마 안되는 할아버지, 할머니이긴 했다. 그러니까 그 많은 신 중에서도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하지만 몰랑이씨가 정작 음악의 신과 예술의 신 이후 어떤 신을 했냐 하면,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신이 아니라 신도였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넘어갔다.
“호오박, 아니 내가 변론지옥이라니, 호오박…….”
끔찍했다. 디저트만 계속 공급하면서 24시간 토크로 자신을 압박하다니. 것도 대부분이 지성의 신인 자신도 모르는 전문 지식이라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짓거리야! 하고 다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 그러나 지은 죄가 있어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흠, 그래. 오늘 다 정리되면 그 분들게 가 볼까? 아니야, 호박씨는 머리를 굴리다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보았다.
“흠, 오늘 정리하면 감감이님께 가봐야 겠어.”
불운의 신의 신도인 감감이는 대학생이면서 전생에 특수작전부대(대한민국 부대로 따지면 SDT 같은)를 했던 이였다. 여자로 환생한 지금도 ROTC를 하면서 엔지니어학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감감이는 몰랑이씨가 어렸을 때부터 거의 업어 키우다시피 한 사이라 한 번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오오, 찾아가 봐야겠다!”
그는 찾아갈 인물 목록을 좌라락 쓰고는 몰랑이씨의 업적에 대해서 정리했다. 일단 아무리 딸기님이 초반이든 중반이든 잘 찾아도, 결국 일대기를 쓰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였다. 복수의 신인 레인님이 당신은 딸기님보다도 더욱 얄미우므로 특별히 맡기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귀요미에게서 얻은 업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미룽의 특산물 홍보대사도 했다, 호박.’
미룽의 특산물은 돼지 감자다. 돼지 감자가 요즘 인간계에서도 건강식품으로 핫하긴 하다만, 이상하게 천계 지향 국가인치고는 미룽과 연관이 많았다. 귀요미를 입양한 당시 고아에 대한 관심이 들어서 더 그런 걸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어떨까?
호박은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미룽의 대통령에게 불쑥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