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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Nov 07. 2022

오래 바라본 그림

'안젤름 키퍼' 전시를 다녀와서

금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아이와 함께 한남동에 갔다. 지난주에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봤고, 이번 주는 <안젤름 키퍼,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을 보기로 한 것. 평일 오후면 대부분 아이들이 학원에 가는 시간이지만 아이는 광역버스를 타고 미술관에 간다. 어떤 교육적인 목적을 갖고 가는 건 아니다. 그저 지친 일상의 탈출구를 찾고 싶은 엄마와 열 살 아들의 데이트 코스.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보는 메일이 있다. 동아일보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 대개 메일은 열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넣지만 이건 꼭 클릭해서 본다. 국내 가볼 만한 전시를 소개해주거나 생생한 미술계 소식을 전해주는데 미술관의 친절한 도슨트처럼 어렵지 않게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꽤 긴 분량의 글인데도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며 끝까지 읽게 된다. 


안젤름 키퍼를 알게 된 것도 뉴스레터(‘독일 거장 매혹적인 폐허’, 2022.9.17.)를 통해서였다. 뉴스레터를 읽다  해바라기 씨로 별자리를 표현한 <고래자리>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겨울 옆 반 선생님과 리움 상설 전시에 갔을 때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땐 그가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다.      


얼마 전 채널예스 매거진에서 강윤정 편집자가 안젤름 키퍼 전시를 다녀와서 쓴 ‘밤의 미술관’이라는 칼럼을 읽었다. 글에 표현된 전시 작품과 미술관 분위기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안젤름 키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라니 나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계절감을 느끼기에도 더없이 좋은 전시.      


아이는 미술관에 들어서자 가방을 뒤지며 지난주 현대미술관 아트숍에서 산 작은 스케치북을 찾았다. 미처 챙겨오지 못해 나는 대신 내 다이어리를 건넸다. 아이는 연필과 다이어리를 들고 작품 앞으로 갔다.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전시를 관람했다. 작품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아이. 오늘도 물병을 실내화 가방에 넣어오고, 길을 걸어갈 때도 축구 스텝을 밟아가며 요란스럽게 가고, 이집트대사관 앞을 지날 때는 이집트 전통춤을 춰보겠다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던 열 살 남자아이인데, 미술관에서만큼은 제법 진지하다. 아이는 다이어리에 이런 단어를 적어 놓았다.     


“나뭇잎, 얼어붙은 강, 붉은색, 물든 나뭇잎, swirly colors, 가을의 황금 세대, 바람의 휘파람, 가을의 웃음, 녹슬은 웃음, train track….”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나 느낌, 단어를 끄적여놓은 메모는 아주 유용하다. 시간이 지난 후 찍어놓은 사진만 보면 내가 이런 걸 봤었나 싶을 만큼 아득해질 때가 있는데 메모는 그렇지 않다. 단어 몇 개, 불완전한 문장들이 그때 봤던 작품과 감정들을 생생하게 불러온다. 다이어리 한 페이지에 적어놓은 아이의 올망졸망한 글씨를 나는 릴케의 시를 읽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본다. ‘녹슬은 웃음’이라니.  

   

낙엽과 물감을 두텁게 붙이며 화산이 폭발하듯 표현한 작품을 보며 상념과 고민이 어지럽게 쌓여있는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데 그건 질감이 궁금해서였기도 하지만 애처로움이 느껴져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미술관에 가면 눈으로 보는 건 작품이지만 나의 내면이 들여다보인다. 작품을 한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멀찍이 거리를 두고 다시 바라봤다. 수없이 흔들리며 혼란스러워하는 삶 또한 자연의 한 부분임을. 가까이서 볼 때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으로 보였는데 물러서서 보니 그 너머에 단단하고 깊은 아름다움이 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아이를 불러 중정 테라스로 나갔다. 콘크리트 벽에 네모난 프레임, 철제 계단, 푸른 잎이 무성한 커다란 화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신혼여행으로 빈에 갔을 때 골목을 걷다 본 장면 같았다. 나는 이 공간에 느긋이 있고 싶어 작은 벤치에 앉았다. 


“가을을 그려줘.” 


내가 부탁하자 아이는 흔쾌히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렸다. 새끼손가락이 바닥에 닿은 면이 까매지도록 열심히 그린 그림. 바닷가 절벽 위에 나무 하나가 낙엽을 떨구는 모습을 세 개의 거울이 비추고 있다. 아이의 그림은 늘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다. 아이의 가을, 아이의 세계. 나는 아이 손때가 묻은 미술관의 마지막 작품을 가장 오래 바라봤다. 


Anselm Kiefer : Wer jetzt kein Haus hat

2022.09.01. ~ 2022.10.22.

타데우스 로팍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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