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나란히 앉아 팔걸이 위에 서로의 손을 포개고
아이 일곱 살 때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2층 제일 끝좌석에서 보여준 적이 있다. 자리에 앉으니 무대가 너무 작게 보여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막상 아이는 별로 개의치 않고 두 시간 내내 푹 빠져 봤다. 그 후 아이는 차이콥스키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오케이였다. 어린이날 선물을 뭘 해줄까 고민하던 중 성남아트센터에서 어린이날 당일 <차이콥스키 발레 모음곡> 음악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번 어린이날에는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닌 ‘음악’을 선물하기로 했다.
‘어린이날 패밀리 클래식’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공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협연자가 무려 세계적인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이었다. 어린이날 고티에 카퓌송을 보다니! 평소 그의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있어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하고, 유튜브를 통해 그의 영상을 꾸준히 본다. 그가 에펠탑 전망대에 올라 센 강을 바라보며 ‘사랑의 찬가’를 연주하는 영상은 볼 때마다 감탄하기도 하면서. 그의 실물을 직접 보며 연주를 듣게 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이를 낳고 6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고티에 카퓌송 첼로 리사이틀’을 보러 예술의전당에 갔었다. 아기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혼자 집을 나선 첫 외출이었다. 매일 밤낮으로 모유 수유를 하며 아이에게만 매달려 있다가 그날은 콤팩트와 립글로스만 넣은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서울 가는 광역버스를 탔다. 가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가을밤 그가 연주했던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가 무척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아이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도.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후 열한 살이 된 아이와 남편과 같이 그의 연주를 들었다.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모음곡’ 사이에 그가 협연하는 ‘대니 엘프만의 첼로 협주곡’이 있었다. 대니 엘프만은 <굿 윌 헌팅>, <맨 인 블랙>, <스파이더맨> 등의 영화음악을 맡았던 미국 작곡가다. 현대음악은 좀 난해하고 익숙지 않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고티에의 연주라 상체를 최대한 무대 쪽으로 기울이며 집중해서 들었다.
이 곡은 대니 엘프만이 고티에 카퓌송에게 헌정한 곡으로 이날 연주가 아시아 초연이라고 한다. 첼로로 과감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고, 중간중간 영화음악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겨 신선했다. 그래도 그가 하이든, 드보르작,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다면 더 기뻤을텐데. 고티에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영화 속의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음악이 더 드라마틱하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지휘자 다비트 라일란트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향해 오랫동안 박수를 쳤다. 자신에게 끊임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에게 오늘 연주가 듣기 좋았다면 그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덕분이라고 말해주는 듯한 겸손한 제스처였다. 몸에 밴 훌륭한 매너와 예술적인 분위기는 그가 프랑스 사람임을 상기시켰다.
얼마전 친정엄마가 어린이날 계획을 묻자 아이는 뽐내듯 “우리 차이콥스키 음악 들으러 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랬던 아이는 1부 내내 자다가 고티에 카퓌송 연주가 끝나고 사람들이 박수치는 소리에 깼다. 다행히 고티에가 앙코르곡으로 어린이날을 축하한다면서 연주한 프로코피예프의 <‘March’ from Music for Children>은 들을 수 있었다. 음악회가 끝나면 아이가 좋아하는 파스타 집에 가자고 하니 아이는 들떴다. 2부 때는 음악의 선율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엄마 아빠를 한 번씩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감상했다.
나는 어린이날 선물로 좀 더 의미있는 걸 해주고 싶어 음악을 골랐다. 그러나 아이가 받은 건 그게 아닌 듯하다. 이날 어떤 곡이 연주되어도 아이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힘들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와 실패를 겪고 방황하는 아빠지만 모처럼 셋이 나란히 앉아 팔걸이 위에 서로의 손을 포개고 아름다운 것을 같이 누렸다. 아이가 받은 선물은 엄마, 아빠와 함께 보낸 시간,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이란 그림책에는 세계 각국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단어가 나온다. 그중 네덜란드어 ‘헤젤리흐’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주는 고양감을 뜻한다. 올해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스스로에게 자꾸 묻게 된다. 어린이날 엄마,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말하는 아이를 보며 그 답을 찾아간다. 그저 하루하루에 헤젤리흐를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