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들어가고선

지연 입장이 좋았다고

by 레아

공연을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레 곁가지를 치며 다른 것들도 좋아하게 된다.

가령 '지연 입장'이 그런 경우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첫 장면을 놓치기에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 어떤 공연은 오히려 늦게 들어가서

다른 느낌의 감흥을 얻고 온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늦게 가면 다른 관객들에게

폐를 끼치니 절대 그럴 순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지연 입장으로 복권 같은 행운을 누린다.


주말에 무용 공연을 보러 가니 지연 입장 시각이

본 공연보다 30분은 지나야 했다.

창작진의... 뭐랄까, 자부심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바로 들여보내지 않는,

초반 에피소드 작품에 대한 예우?

3분 정도 늦었으니 27분을 로비에서

모니터를 통해 공연을 보았다.

극장 안팎 모니터 라이브를 본다든가

모퉁이 다른 데에서

공연을 보고 있으면 좀 다른 기분이 든다.

스태프일 땐 그 감흥이 엄청나고,

관객일 때도 조금 그렇다.

어릴 적 그 기분을 알았더라면

이십 대 때 극장 어셔 일을 해보고 싶었을 것 같다.

항상 같은 공연을 관객과 다른 자리에서 보거나

듣거나 할 수 있는, 그들이 위치한 문쪽 자리가

지금도 늘 궁금하기도 하고 내 눈엔 좋아 보였다.

일 때문에 극장 맨 뒤나 모서리에서 보았던 경험은

그래서 더 그 기분이 특별하고 오래 남기도 한다.

관객 밖에서 관객을 보는 일이 설레고

저마다 다른 반응들이 실시간으로 현장에서 나오는 게

신기해서 괜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이번에도

지연 관객끼리 모여서 모니터를 바라보는

장면이 색다르게 다가왔고, 로비가

댄스필름 시사회 살롱 같은 느낌으로

변하기도 했다.

예전에 야구 방송 일을 할 때

사람들이 야구장인데

야구 모니터로 경기장 모니터 중간중간

야구를 집중해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어떤 짜릿한 첫설렘과 좀 비슷한 차원이다.

내가 일하는 과정물, 결과물들이 실시간으로

누군가 낯선 이들에게 닿고 있는 걸

직접 맨 눈으로 보고 있어 좋았고,

나와 관계없는 현장이라도

또 그 나름대로 실시간 벌어지는 어떤 분위기의

교환을 그 장소에서 체험할 수 있는 덕분이다.

이번 무용의 지연 입장도 그랬다.

맨 앞자리를 끊은 탓에

또 다른 나머지 지연 관객들과는 분리되어

무대 바로 옆 문으로 혼자서만 입장하게

되었다. 약간 어릴 적 어린이대공원 귀신의 집

(그렇게 애용하진 않았지만)

놀이시설에 대기하는 기분 같기도 했다.

심수봉 노래가 나오고 길옥균 곡으로 바뀌는

타이밍이었나. 그 간극 3초 사이.

아주 어두컴컴한 극장 문 통로에

대기하고 있었다. 숫자를 세어 보았다.

1초, 2초, 3초 ... 어셔가 문을 열어주었다.

3초의 적막과 어둠이

내가 그날 겪은 가장 고마운 감정, 기대감이었다.

음악과 음악 사이 적막. 잠시의 고요.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바로 펼쳐지는 무대의 분위기와 눈 앞 무용수들.

나는 기어가듯 수그린 채 제자리에 가 앉았는데,

낮은 자세 전의

그 대기 시간이 참 좋았다.


좋아하던 공연들의 시작 전 기분들을

떠올리게도 했고,

어둠과 흥이 교차되는 지점을

경험시켜주어서 고마웠다.


공연이 끝난 뒤

친구를 만났다.

지연 입장을 했다고 하자,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에서

들어왔구나, 알아채었다.

맞아. 그 가사가 들릴 때 자리에 앉았어.

어디선가 그 옛노래가 들리면

그날의 복도 기분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지연 입장을 하게 만든 자전거 사고도.

동시에.


공연을 보러 가던 중 공유 자전거 따릉이를 탔다.

친구에게 줄 책을 챙겨 자전거 앞에 실었고

오랜만에 보는 무용 공연에도

친구에게 책을 전해줄 생각에도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이렇게 자중하지 못하고 기분이 좋아 달릴 때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에선 꼭 사고가 나지,

라는 생각을 한 지 진짜 몇 분 만에

나는 머리를 트럭에 부딪쳤다.

다행히 괜찮았다. 혹 몇 개로 타협.

커브길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왔고 오른쪽으로 바로 핸들을

꺾었는데 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넘어지지 않고

약간 발을 헛디디고 튕겨서 옆에 있던 트럭에 머리를 박았다.

사람과 부딪치면 좀 덜 다치고

내가 꺾으면 좀 위험하게 느껴진 길목였는데,

무의식적으로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게

너무 싫은 성격이 반영된 것도 같았다.

작렬히 홀로 전사했다.

무르팍과 팔꿈치도 바닥에 닿아 약간 까졌지만

머리 충격이 세서 다른 곳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 얘기를 하자 친구도 가족도

트럭 전화번호 받아왔어? 라고 바로 물었는데

차량은 죄가 없다.

내게 온 게 아니라 내가 향했다.

받힌 게 아닌 받친 것.

아니 트럭이라기보다는 용달차 표현이 맞겠다.

화분과 과일 파는 파란색 용달차였다.

아저씨는 놀라서 나왔고

주변 사람들이 괜찮냐고, 조심 좀 하지,

라고 말했다. 역시 따릉이는 한강에서 타야지,

길에서 타면 안 된다는 스스로 못 지킨

약속을 다시금 했다.

헬멧 쓰지 않는 이상,

어디서 갑작스레 사고를 겪을지 모르니

이젠 자중해야겠다.

나는 넘어진 자전거에서 일어나자마자,

용달차 뒷 화분 진열대 쪽 평면을 만져 보았다.

아저씨 이거 그렇게 단단한 거 아니죠?

조금 딱딱했다.

머리를 만져야 되는데 순간적으로

내가 부딪친 물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야 했다.

모서리에 박지 않은 게 그나마 너무 다행이라 여겼다.

머리를 만져 보니 곧장 혹이 생겼다.

찬 음료를 사 냉찜질을 하고

그냥 무용을 보러 갔다.

친구에게 오는 길이 너무 험했다고 말하며,

자전거 사고를 비롯 그간 겪은 안 좋은 일들까지

마구 털어놓는데 왜인지 계속 웃음이 났다.

친구도 웃었다.

문득 친구가 친구인 이유는

어떤 일이라도 희극으로 느끼게 만드는

사이였기에, 가능하단 잠정 결론에 이르렀다.

예전엔 슬픔을 나누어 친구인 줄 알았는데

이젠 슬픔도 웃음으로 만드는 이,

어려움마저 털어놓다보면 비극보다 희극이 되고

사소한 시트콤처럼 돼 버리게 만드는 게

친구 관계로 보였다.

본질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곁가지로 웃음만 만들어 키워가는 게

우정으로 느껴졌다.

슬픔과 웃음 사이 몇 초 어딘가 진심이 있고,

그건

걱정보다 웃음. 걱정되니 웃음.

결국 웃김으로 장착되어 버렸다.


지연 입장과 더불어 부록 같은 마음을 안고

나는 친구와 짧고 굵게 떠들고

집에 가 머리에 반창고 아니 작은 파스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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