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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Oct 29. 2021

오르막길

편애하는 산책 길목

창덕궁 안 감나무


이번 가을 참 많이 길게 걸었다.

수백 페이지 법률 서적 교정 볼 일이 있었

걸으면서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던 터라,

교정지를 들고 숲길이나 고궁길을

반복해 걸었다.

돈화문으로 들어가 후원을 거쳐

창덕궁을 나와 종묘로

신의 길을 지나 덕수궁으로 다시 경복궁으로

반나절 이상 걸었다.

해 질 무렵 프레스센터 스타벅스에

정착해 앉기까지 걷고 또 걸었다.

때론 풍경에 매료되고 싶어,

잠시 벤치에 앉았다가 다시 붉은 색연필을 꺼내어

글을 읽으며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이만 보를 쉽게 건너 뛰고

때론 삼만 보에도 달한다.

반나절 정도를 쉬지 않고 걸으며

글자들을 쉴 새 없이 보다보면,

내가 글자인지 글자가 나인지

모를 상태에도 이르는데,

그 즈음 되고 나면

글자에서 눈을 떼는 게 강박적으로

싫어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정신 차리고

다시 숲의 나무를 바라본다.

그러면 뻑뻑한 눈이 좀 풀린다.


주말 오전 고궁에 가면 제법 한적하다.

가을 단풍철에는 입구에 사람이 많긴 해도

그 안에 들어서면 워낙 터가 넓으니 느릿느릿

이곳저곳 걸으면 사람과 부딪칠 일도 없고

한가로이 글을 볼 수 있다.

때론 너무 고즈넉 으스스한 지점도 있다.

창덕궁 후원 옆에 두고 오른 편으로

따라가서

다시 왼편으로 나오는 언덕길이 그렇다.

그곳은 왕이 직접 농사를 경험하며

백성들 마음을 이해해 보았다는

옛날 터가 나오고 그 부근 연못과

초가지붕 정자를 지나

오르막길로 오르면

더없이 한적하고 고요한 공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저 너머 사랑하는 동네 

대학로 명륜동 건물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가장 좋아하는 오르막길이 어 버렸다.

후원에서 편애하는 언덕배기.

그 길에서 좀 더 깊이 가는 길은,

아직 가보진 못했다.

고궁은 거의 홀로 가다보니 으슥한 곳은

피하게 되고

누군가 같이 갔을 때는 동반자의 걸음 거리를 조절해

배려하다 보니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다.

걸음이 좀 빠른 까닭인데,

보폭을 맞춰주려면 느리게 걷고

그러면 어느 목표 지점까진 못 간다.

함께 느리게, 홀로 빨리 사이에서

그 어떤 것을 구태여 선호하지 않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후원 깊은 곳의 외진 길.

그 둘 중 하나로 언제쯤 가겠

남겨 두고 있다.

요샌 코로나 19 시기라서

후원도 단체로 걸어다니지 않고

입장권을 입구에서 리자에게 보여주면

개별적 산책을 할 수 있어

그게 의외로 장점이.

예전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도 튀어 나왔다는,

그늘진,

나무숲이 이어지는 언덕길.

주변을 배회하며 얕은 산등성이 넘듯

넘고 나면 다시 평지다.


지난 번엔 그 길목들에서

오르막길을 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


사춘기 땐 남산 언덕길을

대학시절엔 캠퍼스 언덕길 

종종 걸으며 책을 읽었다.

마치 요새 휴대폰으로 드라마나 예능 보듯이.

특히 주말들에 몰아서.

언덕 끝 도서관과 학생회관 앞 계단에서.

바람을 쐬며 어느 작가의 책한 호흡으로 읽고 나면

그 작가의 다음 궤적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동시에 내 안의 대화와도 맥이 닿아

서늘하게 혹은 따뜻하게

그때 그때 다르게 다가왔다.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걸으면 공간이 그때의

감정들로 데려다.

그리고 책을 읽을수록 혹은 많이 안다고 착각할수록

더 감정이입이 될수록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

웃음기 사라 날들이 떠랐다.

일정량의 성숙이나 깨달음의 낱장 같은

하루하루 감정들

과 반비례는 듯했다.






편애하는 창덕궁 후원 속 언덕길. 종로구 명륜동이 보이는 도심 고궁길
창덕궁 후원의 정조 시대 규장각. 이 길을 정약용 박제가 정조 등이 걸었으려니 떠올리면 왠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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